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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승우 법무법인 율촌 상임고문, 서울대 객원교수 |
침해기업이 보유한 기술·거래 정보에 접근하지 못해 피해 입증에 실패하는 구조는 그간 기술탈취 소송의 가장 큰 한계였다. 실제로 중소기업의 기술침해 분쟁은 매년 수백 건에 이르지만, 소송 사건 중 상당수는 ‘침해의 개연성’은 인정되면서도 구체적 유용행위나 손해액을 입증하지 못해 패소하거나 제한적인 배상에 그쳤다. 핵심 설계도면, 내부 이메일, 생산공정 데이터 등 결정적 자료가 상대방에게 편재된 상황에서, 피해 기업이 이를 확보하지 못해 증명의 벽을 넘지 못한 사례가 반복되어 왔다.
지난 1월 29일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 개정안의 국회 통과는 이러한 구조적 불균형을 교정하는 중대한 전환점이다. 특히 동 개정은 우리 민사소송 체계에서 ‘한국형 증거개시 제도(K-디스커버리)’가 최초로 도입된 입법례라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 그동안 우리 법제는 당사자주의와 제한적 문서제출명령에 머물렀으나, 이번 개정으로 증거확보 단계에서 실질적 권한을 부여할 수 있게 됐다.
개정안은 첫째, ‘전문가 사실조사’ 제도를 신설했다. 법원이 지정한 전문가가 상대방의 사무실·공장에 출입하여 자료 열람·복사, 장치 작동 등 필요한 조사를 수행하도록 하여 증거 편재 문제를 실질적으로 완화했다. 둘째, ‘자료보전명령’ 제도를 도입해 소 제기 전 또는 진행 중 증거 훼손 우려가 있는 경우 법원이 자료의 보전을 명할 수 있도록 했다. 셋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당사자가 직접 상대방을 신문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했다. 이는 미국식 당사자신문의 요소를 도입한 것으로, 우리 법제상 전례 없는 변화다.
한편, 법원의 자료제출 요구가 있는 경우 중소벤처기업부장관이 행정조사 기록을 제출하도록 의무화하여 행정조사와 민사소송 간의 연계를 강화했다. 이는 국가가 확보한 정보를 사법적 진실 발견에 활용하도록 한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번 개정안의 입법 취지는 분명하다. 기술 중소기업이 소송에서 패하는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혁신 생태계는 유지될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는 단순한 분쟁절차 개선을 넘어, ‘공정과 상생의 시장질서 구축’이라는 국정과제와도 맞닿아 있다. 정부의 ‘진짜성장’ 전략이 공정한 성장과 성장 유인 회복을 강조하는 만큼, 기술탈취를 억제하고 정직한 혁신이 보상받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그 핵심 과제인 셈이다.
그러나 제도 도입은 출발일 뿐이다. 향후 정부는 전문가 풀 구축, 대법원규칙 정비, 기업 가이드라인 마련 등을 서둘러야 한다. 또한 기술보호 역량을 사전에 강화하는 정책과의 연계가 중요하다. ‘중소기업 기술보호 바우처’를 통해 단계별로 지원하고, 역량이 우수한 기업을 선도기업으로 육성하는 현행 사업은, 분쟁 예방과 사후 구제를 연결하는 정책 인프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또 전문가 사실조사를 디지털포렌식, 손해액 산정 지원 등과 연계한다면, 예방·입증·회복의 선순환 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
이번 개정은 단순한 절차 보완이 아니다. 기술주권 시대에 걸맞은 사법 인프라의 재설계를 의미하는 역사적 이정표다. 이제 남은 과제는 이를 현장에서 살아 움직이는 제도로 만드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