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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약한 인간들의 이해와 연민…포도뮤지엄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

애나벨 다우·쇼 시부야·이완 등 작가 13명 참여
네 번째 기획 전시…내년 8월 8일까지

애나벨 다우의 ‘When in the course of human events’. [포도뮤지엄]

[헤럴드경제(서귀포)=김현경 기자] “인류의 역사에서(When in the course of human events)….”

미국 독립선언서의 첫 문구로 시작하는 수백 개의 문장들이 거대한 두루마리 모양으로 전시장 벽에서 바닥까지 펼쳐져 있다. 머리카락보다 가느다란 초극세사로 만든 검은 마이크로파이버 위에 하얀 수정액으로 쓰인 수백 개의 문장들은 시민들이 완성한 것이다. 독립선언문과 달리 이어지는 문장들은 ‘숨쉰다’, ‘걷는다’, ‘바라본다’ 같은 일상의 소소한 행위들로 채워진다.

인간의 유한함과 불완전함을 인식하고 이해와 연민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기획 전시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이 9일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포도뮤지엄에서 막을 올렸다.

애나벨 다우, 쇼 시부야, 이완, 부지현, 김한영, 모나 하툼, 제니 홀저, 라이자 루, 수미 카나자와, 마르텐 바스, 사라 제, 송동, 로버트 몽고메리 등 13명의 국내외 작가들은 이번 전시에서 회화, 설치, 영상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인간 존재의 연약함과 찰나의 삶을 섬세한 시선으로 탐구한다.

8일 제주 서귀포시 포도뮤지엄에서 기획 전시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 참여 작가들이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포도뮤지엄]

레바논 태생으로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는 애나벨 다우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언어를 통해 분열된 세상 속에서도 인간이 가진 공통 분모를 되새긴다.

애나벨 다우 작가는 지난 8일 포도뮤지엄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내가 갖고 있는 통제를 다 놓아버리고 시민들에게 평등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장을 제공하고자 한다. 흔히 예술에서 보이는 시적인 면모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면도 있다”면서 “모두에게 평등한 공간을 만들고, 모든 위계질서를 타파하고, 모든 의미, 모든 참가자, 모든 응답이 평등하게 반영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살고 있는 격동의 시대 속에서 과연 우리가 살아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반추해 줬으면 좋겠다”고 작품의 의미를 소개했다.

쇼 시부야의 ‘Event’ 연작 중 12·3 비상계엄을 소재로 그린 태극 문양. [김현경 기자]

일본 출신으로 미국 브루클린에 거주 중인 쇼 시부야 작가는 뉴욕타임스 위에 뉴스를 상징하는 그림을 그린 ‘이벤트(Event)’ 연작과 햇빛을 그린 ‘Sunrise from a small window’ 연작을 선보인다.

작가는 코로나 팬데믹 초기인 2020년부터 매일 아침 옥상에 올라 하늘을 바라보고 뉴욕타임스를 읽는다. 그중 본능적으로 고른 뉴스와 그때 비친 햇빛의 모습을 신문지 위에 그렸다고 한다. 참사와 전쟁 등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매일의 반복이 지닌 위로와 희망을 찾아내려는 시도다.

이번에 전시된 18점의 이벤트 연작 중에는 12·3 비상계엄 사태와 무안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이태원 참사, 경상도 산불 등 한국의 뉴스를 다룬 4점도 포함됐다.

특히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을 소재로 그린 ‘태극 문양’이 주목을 끈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 참여하게 된 중요한 계기”라며 “당시 한국에 살고 있는 친구가 ‘2024년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연락을 해 왔다. 마침 옥상에서 평온하게 그림을 그리던 중이었는데 친구가 처해 있는 상황과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 얼마나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지, 흑백의 대비를 실감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완의 ‘고유시’. [포도뮤지엄]

한국의 이완 작가는 새하얀 복도 벽면을 가득 채운 560개의 하얀 시계가 저마다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작품 ‘고유시’를 전시했다. 미국의 의사, 인도의 농부, 독일의 학생, 한국의 직장인 다양한 사람들의 노동시간과 식사비를 조사해 개인마다 다른 시간의 속도를 시계로 구현했다.

그는 “시간은 모든 사람, 모든 국가, 모든 문명을 연결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 되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삶을 프레이밍 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면서 “각자의 삶의 속도가 굉장히 다르게 흘러가고 있고, 자본주의 시스템과 모든 구조들에 대한 차이들로 인해 격차 혹은 계급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소개했다.

제주 출신인 부지현 작가는 폐집어등과 소금을 사용한 설치 미술로 이번 전시에 참여했다. 바닥에 가득 펼쳐진 소금은 작은 생명체들의 흔적을 상징하고, 그 위에 설치된 집어등은 어민들의 노동과 생존을 상징하는 도구로 관객에게 낯선 그리움을 일깨운다.

김한영 작가는 유화 물감을 붓끝으로 찍어내는 작업을 수없이 반복함으로써 작은 뿔처럼 솟아오른 물감 덩어리로 트위드 천 같은 표면을 직조했다. 멀리서 보면 평온한 색의 흐름으로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미세하게 다른 각각의 터치와 질감이 드러난다.

작가는 이를 통해 개별적으로는 미미해 보이는 각각의 흔적들이 서로 지탱하며 거대한 전체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나 하툼의 ‘Remains to be Seen’. [포도뮤지엄]

이번 전시는 2021년 개관한 포도뮤지엄의 네 번째 기획 전시다. 앞서 세 번의 기획전에선 약 10만 명씩이 뮤지엄을 다녀갔다.

포도뮤지엄은 제1전시실 ‘망각의 신전’, 제2전시실 ‘시간의 초상’, 제3전시실 ‘기억의 거울’과 테마공간 ‘유리 코스모스’, ‘우리는 별의 먼지다’로 이번 전시를 구성했다. 폭력과 증오의 현실에서 출발해 개인의 고통을 거쳐 자신과 타인이 만나는 상호연결성을 전달한다.

김희영 포도뮤지엄 총괄디렉터가 8일 포도뮤지엄에서 전시를 설명하고 있다. [포도뮤지엄]

김희영 포도뮤지엄 총괄디렉터는 “가끔 우주의 스케일을 떠올려 본다는 것은 생각의 분모를 키우는 일이다. 사람은 내 삶의 문제를 초월하는 경험을 하면 일상의 고민에서 거리를 둘 수 있게 된다”며 “그러한 경험과 이야기를 이번 전시를 통해서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어 “처음에는 다소 무겁고 파격적인 느낌으로 시작하지만 작가들의 눈에서 아름다움과 희망적인 메시지를 발견하고, 폭력에서 치유로의 변화 과정을 체험하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전시는 내년 8월 8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