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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연출가가 만든 창극 ‘심청’의 맛…더 입체적이고 인간적 [판소리 시어터 심청]

오는 13일 전주·9월 3일 서울서 개막
오페라 연출가 요나김 등 獨창작진 호흡
국립창극단 간판 김준수·유태평양 출연
심봉사·심청을 문제적 캐릭터로 재해석

국립창극단 ‘심청’에서 심봉사 역을 맡은 김준수 [국립극장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하나둘 모여드는 맹인잔치. 어둠에 갇혔던 이들이 “눈을 끔적끔적 끔적거리더니…” 마침내 “떴구나!”

그때 무대는 심봉사의 공간으로 향한다. 더듬더듬 벽을 더듬는 맹인 심학규. 연출가 요나 김의 지시가 들려온다. “(김)준수, 스톱! 저쪽으로 가세요. 바닥 내려다보세요.” 뒷걸음질 치다 심봉사는 카세트 라디오를 손에 쥔다.

“추월(秋月)은 만정(滿庭)허여 산호주렴(珊瑚珠簾) 비춰들 제…”

차디찬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라디오를 쥔 아비의 손이 떨리며 황당한 눈 안에 눈물이 가득 찬다. 광명을 찾자 ‘통곡의 날’이 찾아왔다. 국립창극단 신작 ‘심청’(8월 13~14일 전주, 9월 3~6일 국립극장)의 한 장면. ‘추월만정’을 듣는 심봉사의 처절한 눈물은 ‘심청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던 장면이다.

무수히 많은 ‘심청가’가 관객과 만났지만, 이번 ‘심청’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지극한 효심으로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 자신을 희생한 어린 딸 심청의 지극한 효심을 찬양하지도, 용궁에서 돌아와 신분 상승을 하는 금의환향식 로맨스도 없다.

유태평양은 “제작 전부터 이번 ‘심청’은 기존 우리의 판소리 ‘심청가’와는 다를 거라는 소문이 제작 전부터 있었다”며 “그래서 이 심봉사를 꼭 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번 ‘심청’의 특이점은 대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요나 김 연출가에게서 나온다. 이 작품은 국립극장과 전주세계소리축제위원회가 공동 제작,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동 중인 오페라 연출가 요나김(독일 만하임국립극장 상임 연출가)이 대본과 연출을 맡았다. 의상, 무대, 영상, 조연출 등 창작진 모두가 요나김 연출가와 호흡을 맞춰온 오페라 전문가다. 작창은 그간 다수의 국립창극단 작품을 도맡아왔던 한승석 중앙대 교수가 맡았다.

요나 김 연출가는 “파격을 위한 파격을 원치 않기에 이 작품을 통해 파격을 일으키겠다는 생각은 없다”며 “다만 그간 늘 (오페라 연출에서) 해왔던 대로, 대목 대목 음악의 절절함과 감정을 유지하되 그 대목을 낯선 환경들에 방치해놨다”고 말했다.

국립창극단 ‘심청’ [국립극장 제공]

문제적 캐릭터로 태어난 심청과 심봉사

“기존 소리, 원전(심청가)을 그대로 가지고 가면서도 심봉사의 캐릭터와 스토리 해석이 정말 달라요. 심봉사가 눈 뜨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개인마다 다르게 해석되고, 다른 메시지를 주지 않을까 싶어요.”

국립창극단의 ‘간판스타’ 김준수는 새롭게 만나는 ‘심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지난 4월 오디션을 통해 유태평양과 함께 심봉사 역에 발탁됐다. 심청 역엔 소리꾼 김율희와 국립창극단원 김우정이 이름을 올렸다.

한국인이라면 익히 알고 있다 믿었던 ‘심청’이 달라졌다. 등장인물들은 전형성을 벗었다. 네 명의 주연 배우는 일생을 거쳐 성실하게 만나왔던 ‘심청가’의 원전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며 인물을 해석했다.

요나 김 연출가는 기존 강산제와 동초제 판소리를 바탕으로 고전 다시쓰기 작업을 거쳤다. 그는 원전의 모든 대목을 있는 그대로 가져왔으나, 문장과 문단의 재배치를 통해 해체와 재조립 작업을 거쳐 새로운 ‘심청’을 만들었다. 단선적이고 평면적인 캐릭터는 저마다 입체성을 띠고 다시 태어났다.

네 주역이 바라보는 심청과 심봉사가 흥미롭다. 그들이 보는 작품 속 심청과 심봉사는 문제적 캐릭터다.

국립창극단 ‘심청’에서 심청 역을 맡은 김율희 [국립극장 제공]

유태평양은 “심청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 그래서 때론 사람들의 관심을 필요로 하고, 무언가 분출되지 못한 묵은 감정이 있는 사춘기 어린아이 같다”고 했다. 김우정은 심청을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이라고 봤다. 그는 “이 작품에서의 심청은 심봉사에게 사랑받고 싶은 아이이자, 부모의 부담을 스스로 짊어져 내면의 불안과 고립, 억눌린 감정이 큰 입체적인 인물”이라고 했다.

심청은 한국 사회에서 대대로 ‘천출지효’의 대명사로 그렸다. 아버지를 위한 갸륵한 효심에만 초점을 뒀을 뿐, 어린 딸을 희생양 삼는 가정과 사회의 집단 이기심은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김율희는 이 작품을 통해 그간 ‘심청가’에 가졌던 의구심을 하나씩 해소해 가고 있다. 그는 “기존 ‘심청가’에선 심청은 어떻게 이렇게 착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모든 것을 수용하고 자기가 안고 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선 그런 심청의 감정을 들여다본다”며 “주변의 모든 것들이 심청을 죽음으로 내몰지 않았을까, 심청이 죽게 된 진짜 이유와 그녀의 감정은 무엇이었을지 들여다보는 것이 기존 작품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했다. 김우정도 “심청이 인당수에 빠진 이유는 효가 아니라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굴레에서 도망치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자 그것이 유일한 선택은 아니었을까 싶다”고 했다.

무능력하지만 착해빠진 눈먼 아버지였던 심봉사는 문제적 인물이다. 심봉사는 단지 ‘심청의 아버지’ 혹은 ‘맹인 심학규’라고만 그리지 않는다. 그는 욕심에 눈이 멀어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진실과 정의에 눈 감아버리는 사람이다.

유태평양은 “심봉사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는 본능에만 충실한 철부지 노인”이라며 “무능력한 사회 부적응자의 모습이 투영된 느낌”이라고 했다. 김준수가 바라보는 모습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심봉사는 무기력하고 나태하면서 우리 인간의 나약함을 그린 캐릭터”라고 했다.

이 인물을 만든 요나 김 연출가는 “우리는 많은 실수를 하고 눈이 멀어 있다. 가끔 깨닫지만 잊어버린다”라며 “심봉사의 모습이 우리 모두의 초상”이라고 말했다.

국립창극단 ‘심청’에서 심봉사 역을 맡은 김준수 [국립극장 제공]

처절 vs 절제의 심봉사, 치밀 vs 날것의 심청

두 명의 심청과 심봉사가 그려가는 무대는 ‘골라보는 재미’가 있다. 자기 안에서 곱씹어 나온 심청과 심봉사는 배우마다 각기 다른 해석을 입고 그려질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 심청은 두 사람의 실제 성격만큼 캐릭터의 표현이 달라진다고 동료 배우들은 입을 모은다. 유태평양은 “제가 느끼는 김율희는 굉장히 치밀하고 캐릭터를 세심하게 분석해 연기한다면, 김우정은 뭔지 모를 날 것의 연기를 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차이는 상대 배우에게도 다른 반응을 끌어낸다. 그는 “그래서인지 두 명의 심청이 같은 신을 연기할 때 내가 리액션하는 게 달라지는 것 같아 너무나도 흥미롭다”고 귀띔했다. 김우정은 더블 캐스팅된 김율희의 심청에 대해 “매우 강단이 있는 심청”이라며 “우직함 속에 숨기고 있는 여린 마음이 잔잔하게 비치는 것 같아 더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김준수와 유태평양이 바라본 심봉사의 모습은 연기로도 고스란히 그려진다. 김우정은 “준(김준수) 심봉사는 정말 철부지 같은 부랑자(?)의 느낌이라면, 태(유태평양) 심봉사는 무기력한데 고집 센 아버지의 느낌”이라며 “연기할 때 호흡이 달라 맞추는 재미가 있다”고 했다.

국립창극단 ‘심청’ [국립극장 제공]

캐릭터의 해석이 달라지자 배우들의 연기도 다른 결을 입는다. 김준수는 “원전에선 눈을 떠 해피엔딩으로 결말짓지만, 이번 심봉사는 눈을 뜨고 나서 밀려오는 죄책감과 삶의 공허함이 자신을 더 짓누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 심경이 연습 과정에서 김준수를 통해 처절하게 그려진다. 의상 디자이너 팔크 바우어와 영상을 담당한 벤야민 뤼트케는 “김준수가 퍼포먼스를 할 때면 모두가 고요해지고 숨을 멎게 된다”고 했다.

위산이 역류할 정도로 혼절하는 김준수의 심봉사와 안경 너머로도 ‘신들린 맹인’ 연기를 보여주는 유태평양의 심봉사는 각기 다른 소리와 연기로 관객과 만난다. 김준수는 “우리 둘은 각각 감성적인 심봉사와 절제된 심봉사”라며 “(태 심봉사는) 경험을 토대로 한 절제로 더 먹먹하고 감정의 폭이 넓다. 반면 나의 심봉사는 직관적이고 모든 걸 쏟는다. 어쩌면 내게 필요한 것이 절제이지 않나 싶다”고 했다.

새로운 해석을 입고 만나는 ‘심청’을 통해 배우들 역시 매 순간 변화하는 자신을 만나고 있다. 신선한 ‘심청’과 새로운 작업 방식이 출연자들에게도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요나 김 연출가는 배우들이 스스로 캐릭터를 찾아갈 수 있도록 장점을 끌어내고,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는 판을 만들어주고 있다.

유태평양은 “요나김 연출가님은 스스로 그려오는 스케치 위에 배우들이 마음껏 색칠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각 배우의 특장점을 아주 빠르게 알아채는 능력이 뛰어나다”며 “매일 매일 그런 피드백을 듣는 재미로 연습에 임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김준수도 “(요나 김 연출가는) 장면을 만드는 과정에 있어 약속은 하되 그 안에서 자유롭게 그때그때 감정들을 표현해 보라고 한다”며 “연습 때마다 마치 심봉사가 눈을 뜨는 것처럼, 심청가를 바라보는 시선과 해석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