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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슬픔· 상처의 응축 ‘물방울’…먼저 간 이들을 위한 ‘애도’

작고 후 첫 대규모 회고전 ‘김창열’전
22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막
미공개작 31점 포함 120여 점 전시

김창열 ‘물방울’(1971). [개인 소장]

김창열 ‘물방울’(1971). [개인 소장]

[헤럴드경제=김현경 기자] “나는 오랜 시간 동안 물방울을 집착에 가까운 정신적 강박으로 그려왔다. 내 모든 꿈, 고통, 불안의 소멸. 어떻게든 이를 그려낼 수 있기를 바라며.”

샛노란 바탕에, 혹은 하얗디하얀 공간에 커다랗고 투명한 물방울 하나가 맺혀 반짝거린다. 우연히 캔버스 위에 뿌려둔 물이 방울방울 맺힌 것일 수도 있지만, 사실 작가 자신에겐 오랜 시간 걸친 실험과 고민 끝에 이룬 필연적인 발견이다. 작가가 오랫동안 탐구해 온 구체의 조형적 변주가 바로 물방울인 것이다. 파리로 건너간 김창열은 마굿간 같은 허름한 작업실에서 작품명 ‘물방울’을 그린다. 이 작품은 그의 첫 물방울 작품으로 알려진 ‘밤에 일어난 일’(1972)보다 앞선 1971년에 제작된 것으로, 이번에 대중에게 처음 공개된다.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물방울 작가’ 김창열의 작고 이후 첫 대규모 회고전 ‘김창열’이 22일부터 12월 2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에서 열린다.

김창열 ‘제사’(1964). [개인 소장]

이번 전시는 김창열의 초기작부터 대표작, 미공개작 등 120여 점의 작품을 통해 작가가 물방울로 향해 가는 작가의 예술적 여정을 다룬다. 작품뿐 아니라 작가의 생애와 기록 등을 함께 조망하며 그의 작품 세계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보여준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작가 본인의 이름 아래 “FLESH AND SPIRIT(살과 정신)”이라는 문구를 새긴 캔버스 뒷면을 마주하게 된다. 일생에 거쳐 신체와 정신에 대해 탐구한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캔버스의 뒷면은 작가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준다.

그의 초기작 중 하나인 ‘제사’ 연작은 16세에 홀로 월남해 해방과 분단, 전쟁을 겪은 작가의 아픔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총알 자국과 탱크의 흔적처럼 두껍고 거칠게 그어진 선들은 그가 내뿜는 고통스러운 절규인 듯하다. 여동생과 친구들의 죽음을 목도한 작가는 그들의 죽음을 위로하는 제의(祭儀)로서 작품을 그려 갔다.

김창열 ‘무제’(1969년경).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암흑기였던 뉴욕 생활 시기에는 물방울의 전조 작품이 나타난다. ‘무제’(1969년경)는 국내에서 처음 선보이는 작품으로, 매끈하고 정제된 화면 위에 기하학적 형태가 등장한다. 착시를 일으키는 원근감과 함께 색띠 안에 구형의 형체가 배치되고, 응축된 내적 에너지가 외부로 팽창하는 듯한 이미지가 반복된다. 이 작품을 비롯한 미공개 회화 8점과 드로잉 작업 11점이 관객 앞에 새롭게 나온다.

온 벽을 채울 정도로 물방울을 그리고 또 그렸던 작가는 후기에 이르러 화면에 문자를 도입하며 새로운 장을 연다. 7.8m 규모의 대형 마에 먹으로 천자문을 쓰고 물방울을 그려 넣은 ‘회귀 SNM93001’(1991)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이후 처음으로 공개되는 작품이다. 작가에게 천자문은 자연과 우주의 질서를 인식하는 기호로,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한 기반이었고, 물방울은 존재에 대해 질문하는 도구였다. 천자문과 물방울이 어우러진 압도적인 작품은 관람객에게도 묵직한 질문을 건넨다.

김창열 ‘회귀 SNM93001’(1991).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상흔’, ‘현상’, ‘물방울’, ‘회귀’ 네 개의 장으로 마련된 전시에 이어 ‘별책부록’ 같은 공간도 마련됐다. 아카이브 공간 ‘무슈 구뜨, 김창열’은 그가 파리 생활 당시 ‘무슈 구뜨(Monsieur Gouttes, 물방울 씨)’로 불린 데서 따온 공간으로, 미공개 자료와 작품들을 통해 그의 삶과 예술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특히 작가가 오랫동안 상상력의 원천으로 삼았던 초현실주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상형시 ‘Il pleut(비가 온다)’에서 착안한 ‘Il pleut(비가 온다)’(1973)가 국내외를 통틀어 최초로 전시된다.

김창열 ‘물방울 ABS N°2’(1973). [샘터화랑 소장]

이번 전시는 한국 앵포르멜 운동을 이끈 거장 김창열의 작품을 연대기적으로 구성해 생애 전반에 걸친 창작 여정과 예술 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망한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21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김창열 작가의 물방울이 어떻게 나오게 됐는지 짚어볼 수 있는 전시”라며 “그를 새롭게 발견하고 재평가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고 소개했다.

김창열의 물방울이 탄생하기까지는 수많은 상처와 슬픔이 있었다. 전쟁과 분단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어간 여동생과 친구들을 목격한 그는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과 슬픔을 물방울로 응축시켰다. 평생을 그리고도 가족에게 “나는 여전히 못 그린 물방울이 많다”는 말을 남겼다.

전시를 기획한 설원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물방울의 여정은 결국 애도의 여정, 애도의 일기와도 같았다”며 “김창열의 뒷모습을 천천히 마주해 보기를 권한다”고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 ‘김창열’ 회고전 전경. [국립현대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