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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열망과 좌절…이불, 4년만 대규모 전시

리움미술관 ‘이불: 1998년 이후’ 개최
사이보그·아나그램·몽그랑레시 등 150여 점
90년대 이후 작가의 주요 작품 종합적 조망

이불 작가가 리움미술관 ‘이불: 1998년 이후’ 전시장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윤형문, 리움미술관 제공]

[헤럴드경제=김현경 기자] 낡고 깨진 욕조에 하얀 산이 펼쳐진 가운데 검은 물이 들어차 있다. 1987년 박종철 열사 사망 사건을 백두산과 접목한 작품 ‘천지’(2007·2025년 재현)다.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이불의 대규모 서베이 전시 ‘이불: 1998년 이후’가 오는 4일부터 내년 1월 4일까지 리움미술관에서 열린다. 지난 2021년 서울시립미술관 개인전 이후 4년만의 국내 대규모 전시다. 당시 전시가 작가의 초기작을 다룬 데 비해, 이번 전시는 19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온 작가의 주요 작업을 종합적으로 조망한다.

1980년대 후반 한국의 정치사회적 맥락과 맞물린 급진적 작업을 선보이며 등장한 이불은 1990년대 말부터 신체에 대한 관심을 건축, 풍경 등으로 확장했다. 이후 신체와 사회, 인간과 기술, 자연과 문명의 관계와 이를 둘러싼 권력의 문제를 폭넓게 탐구해 왔다. 동시에 국제 무대에 데뷔하며 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에선 작가의 조각, 대형 설치, 평면, 드로잉과 모형 등 150여 점을 전시한다. 초기작인 ‘사이보그’와 ‘아나그램’, 노래방 연작과 ‘몽그랑레시(Mon grand rcit)’ 연작을 중심으로 인류의 진보주의적 열망과 실패에 대한 작가의 고민을 보여준다.

‘이불: 1998년 이후’ 전시 전경. [사진 전병철, 리움미술관 제공]

전시장에 들어서면 길이 17m에 달하는 은빛 비행선 ‘취약할 의향메탈라이즈드 벌룬’이 천장에 설치돼 관람객을 맞이한다. 20세기 초 체펠린 비행선을 참조한 이 작품은 기술 진보에 대한 인류의 열망과 좌절을 동시에 상징한다. 함께 전시되는 ‘롱테일 헤일로: CTCS #1’은 2024년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더 제네시스 파사드 커미션’을 위해 제작된 작품으로 인체, 기계, 건축 파편과 같은 형태가 뒤섞인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블랙박스 공간에서는 대규모 거울 설치 작업 ‘태양의 도시 II’가 벽과 바닥을 감싸며 관람객을 끌어들인다. 여기에는 작가의 초기 대표작인 ‘사이보그 W6’, ‘무제(아나그램 레더 #11 T.O.T.)’,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소개된 노래방 작업 ‘속도보다 거대한 중력 I’, 근대 건축의 유토피아적 상징을 차용한 ‘오바드’가 함께 배치된다. 이 작품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 완전성을 향한 열망, 유토피아적 이상과 좌절이라는 공통된 질문을 던진다.

그라운드갤러리에서는 2005년 이후 전개된 ‘몽그랑레시(Mon grand rcit)’ 연작이 전시의 중심을 이룬다. 이 연작은 프랑스 철학자 장-프랑수아 리오타르가 제시한 ‘거대 서사에 대한 불신’을 출발점으로 한다. 작가는 보편적이고 단일한 서사 대신 개인과 집단의 기억, 역사의 파편들, 다양한 사회문화적 요소를 뒤섞어 알레고리적 풍경을 구축한다.

201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평면 연작인 ‘퍼듀’와 ‘무제(취약할 의향벨벳)’도 선보인다. 이들 연작은 내용적으로 작가의 대표적 조각 연작의 주제와 모티브를 반영하면서, 형식적으로는 회화와 조각을 넘나드는 화면을 구성하거나 자개, 벨벳 등 새로운 재료 실험을 시도한다.

‘몽그랑레시: 바위에 흐느끼다…’(2005). [하이트진로 소장 이불. 사진 Watanabe Osamu. 모리미술관 제공]

이번 전시에서는 그동안 ‘여전사’로 불려 왔던 이불의 다른 면모와 더 넓은 정치사회적 담론을 접할 수 있다.

이와 관련 작가는 기자간담회에서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일어났던 사건 등이 같이 다 녹아 있다”며 “소재와 주제는 상상이 동시에 일어난다. 주제가 떠오르면 재료도 동시에 늘어나는 식”이라고 밝혔다.

그는 “특정한 정체성으로 나를 규정하지 않는다”면서 “여전사도 내가 규정한 게 아니다. 그냥 내 관심사를 한 거고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라며 “그 이후로 더 긴 시간 동안 이런 작업을 해 왔는데 그게 보일 때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전시를 기획한 곽준영 리움미술관 전시기획실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이불 작가를 바라보던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미술, 건축, 문학, 사회 이론과 철학적 사유를 넘나들며 인류의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고 가능한 미래들에 대한 확장된 사유를 이끌어 온 작가의 폭넓은 작품 세계를 경험할 기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는 리움미술관과 홍콩 M+가 공동 기획했으며, 내년 3월부터 홍콩 M+로 이어지는 국제 순회가 예정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