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필 상임 지휘자 세묜 비치코프 인터뷰
오는 28일 예술의전당·29일 롯데콘서트홀
체코 독립기념일에 울려 퍼질 ‘나의 조국’
오는 28일 예술의전당·29일 롯데콘서트홀
체코 독립기념일에 울려 퍼질 ‘나의 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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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 거장 세묜 비치코프가 이끄는 체코 필하모닉(10월 28~29일, 롯데콘서트홀)이 한국을 찾아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M Vlast)’ 전곡을 돌려준다. [인아츠프로덕션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운명의 장난’이랄까요.”
지금으로부터 97년 전 10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치하에서 독립한 체코가 공화국을 수립한 날이다. 이날 한국에선 체코의 자랑인 체코필하모닉이 아주 특별한 곡을 연주한다. 총 6악장·장장 80분에 이르는, 그 유명한 2악장 ‘블타바’(몰다우)로도 익히 알려진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이다. 한국에서 이 곡의 전 악장 실연을 들을 수 있는 무대는 극히 드물다.
세계적인 지휘 거장 세묜 비치코프(73)는 내한을 앞두고 가진 헤럴드경제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우연히 맞아떨어졌지만, 매우 상징적인 일인 것만큼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세묜 비치코프가 이끄는 체코 필하모닉의 한국 공연은 이달부터 12월까지 이어지는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 대전의 최고 기대작 중 하나다. 이틀간 이어질 한국 공연에선 첫날엔 ‘나의 조국’을, 둘째 날(10월 29일)엔 첼리스트 한재민과 협연한 드보르자크 첼로 협주곡 b단조에 이어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을 연주한다.
2018년부터 체코필을 이끈 비치코프는 이 악단의 “음악감독이 되기 전까지는 ‘나의 조국’을 지휘한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체코 필하모닉을 이끌며 “체코 음악의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특히 “체코필 단원들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 음악을 접하며 살아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전까진 이 곡의 해석에 대해 고민한 적이 없었으나 그는 오랜 시간 공을 들며 ‘나의 조국’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스메타나 탄생 200주년을 맞은 지난해엔 체코 필하모닉과 ‘나의 조국’ 앨범을 냈다.
‘나의 조국’은 체코의 음악 유산 가운데 상징적 작품 중 하나다. 스메타나는 체코가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대를 살아낸 작곡가다. 비치코프는 “스메타나는 외세의 지배 속에서 독립을 갈망하던 시기, 민족의 정체성과 언어, 사고방식을 지키려 했다”며 “바그너와 같은 동시대 작곡가들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체코의 음악적 전통을 잊지 않았다”고 말했다.
러시아 출신 유대인으로 미국에서 자랐고, 음악가로서 인생의 절반을 프랑스에서 보낸 비치코프는 세 나라의 정체성을 품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고, 우크라이나 오데사에 살던 외가 쪽 가족은 나치에 몰살됐다.
그는 “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그 감정을 공감할 수 있다. 지극히 보편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라며 “더 크고 강한 나라에 지배를 받은 경험이 있는 모든 국가에 해당한다”고 했다. 러시아 역시 수 세기 전엔 몽골의 침입을 받았다. 2023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목도했을 땐 성명을 통해 “악(EVIL) 앞에서의 침묵은 악과 공범이 되는 것”이라며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대규모 학살”이라는 내용을 담은 성명을 내기도 했다.
그는 “인류가 살아남고 번영하기 위해선 자신의 유산을 자랑스럽게 여기되 역사 속 오점을 인정하고 속죄해야 한다”며 “스메타나의 음악은 우리에게 인류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보여준다. ‘나의 조국’은 시대를 초월해 울림을 주는 보편적이면서 동시대적 작품”이라고 했다.
스메타나는 청력을 잃은 상태에서 ‘나의 조국’의 여섯 악장 중 네 개 악장을 완성했다. 이런 이유로 그의 삶은 베토벤에게 비견되기도 한다.
“전 그를 천재라고 생각해요. 작곡가가 쓴 음악은 실제 소리를 통해서만 생명을 얻는데, (스메타나가) 그 연주를 전혀 들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하면 가슴이 참 먹먹합니다. 스메타나는 체코의 독립을 보지 못했지만, 국가의 정체성을 가장 높은 수준에서 천명하는 특별한 작품을 만들어낸 첫 번째 인물이었습니다.”
비치코프의 이번 한국 공연은 그의 음악적 정체성이 강하게 묻어나는 무대이기도 하다. 차이콥스키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그의 음악 ‘첫사랑’이다. 비치코프는 “열두 살, 소련 레닌그라드 시절에 차이콥스키의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을 봤다. 아주 강렬했다”며 “공연 후 당장 중고 악보를 사 와 가족이 잠든 좁은 공용 아파트 부엌 한켠에서 지휘를 흉내 내봤다”고 돌아봤다.
“차이콥스키와 그의 음악은 하나였어요. 그는 본질적으로 진실된 사람이에요. 삶을 사랑하는 기쁨을 알았고, 동시에 의심과 번민에 시달렸죠. 그것이 그의 음악에 고스란히 묻어났어요. 거짓 없이 모든 진실을 음악에 새겼기에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국경을 넘어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죠.”
비치코프는 지난 2015년부터 ‘차이콥스키 프로젝트’를 착실히 진행해 왔다. 체코필은 비치코프에게 이 프로젝트를 함께 하고 싶다고 러브콜을 보냈고, 그는 “30초 만에 승낙했다”고 한다. 그는 차이콥스키를 “확고히 러시아적인 작곡가”라고 했다. 그렇기에 “슬라브 오케스트라이면서 서구 문명과 전통이 일부에 속해있는 체코필을 통해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8년에 걸쳐 거둔 그의 결실은 한국 공연에서도 만날 수 있다. 그는 “체코필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 차이콥스키 5번 교향곡”이라며 “빈필이나 베를린필, 로열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등 유수 악단과는 다른 고유한 특성을 가진 오케스트라가 바로 체코필”이라고 했다.
일생을 클래식 음악의 세계 안에서 헌신하고 있는 비치코프는 “음악은 언제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클래식 음악은 정신적 양식을 준다”며 “인류가 어려운 시기를 지날수록 위대한 예술이 주는 정신적 양식이 필요하다. 뛰어난 클래식 음악은 사회에 계속해서 막대한 가치를 지닐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이상적인 세계에서 살고 싶어 하지만, 세계는 이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위대한 음악은 그 갈등과 모순을 품고 해답을 찾아냅니다. 음악은 세상이 어떻게 더 나아질 수 있는지 그 길을 보여 줍니다. 거기에서 꿈이 생겨나고 꿈을 키울 수 있어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