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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예산·AI 기술까지…허리띠 졸라맨 한국 상업영화 ‘생존 실험’

한국 영화 침체 속 연상호·강윤성 감독의 ‘도전’
AI 기술 활용 ‘중간계’·순제작비 2억원 ‘얼굴’
kt 스튜디오지니·쇼박스 중·저예산 작품 지원

 
영화 ‘중간계’ 포스터 [㈜포엔터테인먼트 제공]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장원’(변요한 분)과 그 일행이 탄 검정 세단이 ‘재범’(양세종 분)을 납치한 차량을 거칠게 쫓는다. 교차로에서 급히 좌회전하는 승합차를 따라 좌측으로 크게 궤적을 그리며 방향을 바꾸는 세단. 순간 세단을 향해 덤프트럭이 달려오고, 그대로 충돌한다.

곧이어 앞서 달리던 승합차마저도 갓길에 부딪히며 폭발과 함께 전소된다. 잇따른 사고로 죽음의 문턱에 선 이들이 떨어진 곳은 이승과 저승 사이의 중간계. 오는 15일 개봉하는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 ‘중간계’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이 신은 사실 인공지능(AI)이 그린 작품이다.

“폭발 신을 컴퓨터그래픽(CG)으로 만든다고 하면 일단은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AI가 효율적으로 작용하는 부분은 이러한 폭발 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현실감 측면에서 AI가 더 낫다고 볼 수는 없지만, 시간과 비용 면에서 AI의 장점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강윤성 감독)

흥행 부진과 개봉작 가뭄 등 극장가의 침체가 깊어지면서 ‘생존’을 위한 제작 현장의 새로운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독립 영화 크기로 상업영화의 제작 규모를 대폭 줄이고, 신기술을 활용하는 등 비용 절감을 위한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몸집을 가볍게 해 영화 제작의 진입장벽을 낮추고, 동시에 투자비 회수에 대한 부담을 줄임으로써 시장의 체질 개선을 도모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영화 ‘중간계’ 스틸컷 [㈜포엔터테인먼트 제공]

한 제작사 관계자는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어려워지면서 ‘어떻게 하면 한 편이라도 더 만들 수 있을까’란 고민을 해야 하는 시기”라면서 “영화 산업이 돈이 된다는 인식을 투자자들이 가져야 하는데, 그러려면 효과적으로 수익을 낼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도전의 선봉에 선 것은 상업 영화 시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흥행 감독들이다.

AI를 활용한 국내 최초 장편 영화 ‘중간계’는 ‘범죄도시’(2017)를 연출한 강윤성 감독이 ‘롱 리브 더 킹: 목포 영웅’(2019) 이후 6년 만에 내놓은 영화다. 2편을 예고하며 끝을 맺는 이 1시간짜리 영화는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드는 시각 특수 효과(VFX·CG 등을 이용해 만드는 영상 특수 효과 기술)를 AI로 대체했다.

차량 충돌과 폭발, 중간계에 등장하는 크리처와 대규모 전투신 등 영화 전반에 AI 기술을 활용했다. 한국 AI 영화의 개척자로 꼽히는 권한슬 감독이 AI 부분 연출을 맡았다.

강 감독은 지난 13일 서울 용산구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특수효과는 AI를 지원한다는 기준을 갖고 작업을 시작했다”면서 “캐릭터 디자인과 액션 장면 등을 AI가 모두 만들고, 부족한 부분을 VFX가 도와주는 방식으로 진행했다”고 말했다.
영화 ‘중간계’ 스틸컷 [㈜포엔터테인먼트 제공]

AI 활용의 가장 큰 장점은 단연 시간과 비용의 단축이다. 가령 차량에 불이 붙는 장면을 제작하는 데 나흘이 걸린다고 가정하면, AI 기술로는 1분 만에 구현이 가능하다. 특수효과 작업을 위한 크로마키 촬영도 불필요해졌다. 극 중 ‘민영’을 연기한 김강우는 “현장에서 계속 감독에게 ‘더 안 찍어도 되냐’는 질문을 많이 했다”면서 “CG 작업 때문에 스튜디오에서 크로마키 작업을 많이 해봤는데 (그 부분이 생략되니) 배우 입장에서도 체력적으로 덜 힘들었다”고 했다.

AI가 영화 시장에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란 강 감독의 생각은 분명하다. 그는 지난 8월 기자와 만나 “비용과 효율 면에서 과거의 제작 방식보다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은 퀄러티에 대한 우려가 있지만) 퀄리티 부분이 보강된다면 AI가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라면서 “내년이 되면 더 많은 상업영화에서도 필히 AI가 쓰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영화 ‘얼굴’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지난달 11일 개봉한 영화 ‘얼굴’은 저예산 상업영화의 대표적 성공 사례다. ‘부산행’(2016)의 연상호 감독이 연출한 이 작품은 스무 명가량의 스태프가 3주 동안 기동성 있게 제작해 완성했다. 2억 원 남짓의 순제작비가 투입된 ‘얼굴’은 14일 오전 기준 누적 관람객 106만6423명을 기록했다. 누적 매출액 109억원. 제작비의 50배가 넘는다. 섬세한 연출과 베테랑 배우들의 밀도 있는 연기, 그리고 몰입감 있는 서사가 저예산 영화에 대한 편견까지 무너트렸다는 평가다.

‘얼굴’은 처음부터 저예산으로 계획하고 제작에 들어간 영화다. 변화하는 극장 환경에서 영화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배우들도 최소한의 출연료와 흥행 성적에 따른 ‘러닝 게런티’ 계약을 통해 ‘변화’에 동참했다. 연상호 감독의 다음 목표는 ‘얼굴’을 통한 그의 도전이 단지 실험으로만 끝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연 감독은 “‘얼굴’과 같은 제작 방식이 한 번의 실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시스템화하고 싶다는 욕심이 든다”면서 “실제로 제작을 해보니 기본적으로 20억 원 정도의 제작비는 필요하더라. 그 20억 원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구조를 정착시킬 방법을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영화 ‘얼굴’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작·배급사들도 중·저예산 상업영화 제작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편당 예산 규모를 줄이는 대신 제작 편수와 장르적 다양성을 늘림으로써 투자가 위축된 시장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전략이다.

지난 9월 kt 스튜디오지니와 쇼박스는 영화 공동 제작을 위한 전략적 사업 협력 계약을 체결하고, 향후 3년간 총 10편의 중·저예산 영화 상업 영화를 공동 투자·제작·배급키로 했다. 제작비는 양사가 50%씩 공동 투자한다. 드라마 제작에 집중해 온 kt 스튜디오지니는 이번 협력을 통해 영화 시장에 진출한다.

제작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시도도 더해진다. kt 스튜디오지니는 주요 장면을 사전 시각화하는 프리 비주얼라이제이션(Pre-Visualization)에 AI 기술을 접목할 계획이다. 목표는 kt 스튜디오지니가 보유한 AI 기반 제작 역량과 쇼박스의 배급·마케팅 유통 노하우를 바탕으로 콘텐츠 제작·유통의 선순환 구조를 완성하는 것이다.
쇼박스 신호정 대표(왼쪽부터)와 kt 스튜디오지니 정근욱 대표가 지난 9월 진행된 영화 공동 제작을 위한 전략적 파트너십 협약식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kt 스튜디오지니]

kt 스튜디오지니 관계자는 “편당 제작비는 영화마다 다르겠지만 국내 상업영화 평균 제작비를 밑도는 수준으로 계획하고 있다”면서 “관객들의 취향이 세분화되는 상황에서 여러 장르의 영화를 다채롭게 관객에게 선보이고자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