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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APEC에서 승리하는 방법 [허아람]

2025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개최가 가까워 오면서 지정학과 국제무역을 둘러싼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간 정상회담의 결과는 물론 이재명 한국 대통령의 페이스메이커 역할이 얼마나 운신의 폭을 확보할 수 있을지 등 짚어볼 대목이 여럿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만남이 성사된다면 그 또한 세기적 이벤트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적 강점을 강화하고 역내 허브로 부상해 APEC의 가치를 높이는 데 주력하는 게 불확실한 변수에 좌우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AFP·APEC 2025 공식홈페이지·연합]


2025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의 개최국으로서 한국이 공개한 홍보 영상은 화려한 스타들로 가득하다. K-팝 스타 지드래곤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박찬욱 감독, 축구선수 박지성, 셰프 안성재 등이 등장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은 바로 이재명 대통령이다. 그는 회원국 비행기의 착륙을 돕는 항공 유도 요원으로 짧게 카메오 출연한다.

외교부는 이 장면이 내부 위기 이후 한국이 세계 무대로 질서 있게 복귀한다는 의미를 상징한다고 밝혔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윤석열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해 전 세계를 놀라게 했고, 이는 결국 그의 기소·탄핵·극심하게 분열된 조기 대선으로 이어지는 연쇄 사건을 촉발했다. 그 결과 이재명 대통령이 당선되며 정권은 진보 진영으로 교체됐다.

이재명 대통령은 선거운동 초기부터 자신이 ‘실용 외교’라 부르는 노선을 내세웠다. 안보 동맹국인 미국과 주요 경제 파트너인 중국 사이의 경쟁이 심화하는 가운데, 한국은 그 사이에서 진퇴양난에 처했다. 중견국으로서 이런 곤경은 처음이 아니지만, 이번에는 이해관계의 수준이 전례 없이 높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정책은 수출 중심의 한국 경제를 옥죄고 있다. 한편 북한은 공식적으로 ‘통일 포기’를 선언하고 러시아와 새로운 군사동맹을 맺으면서 안보 위협은 한층 고조됐다.

이런 압박 속에서 ‘헤징(위험 분산)’이 외교의 핵심 전략이 됐다. 이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첫 정상회담을 위해 워싱턴으로 향하는 동시에, 각료급 특사를 베이징에 파견했다. 균형 외교를 위한 의도적인 신호였다. 정상회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자신이 트럼프의 “평화 중재자(peacemaker)” 역할을 돕는 “페이스메이커(pacemaker)”가 되겠다며, 한반도 평화 문제를 안보 후견국인 미국에 사실상 위임했다.

이때 영상 속 ‘항공 유도사’의 은유는 외교적 맥락에서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즉, 한국은 거대한 국가들이 가려는 길을 안내해 주고 곧 조용히 물러서는, 작고 순응적인 조력자에 불과하다는 의미로 읽힐 수 있다. 실제로 APEC 관련 보도의 대부분은 한국이나 APEC 자체보다는 트럼프-시진핑 회담이나 김정은의 돌발 등장 여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트럼프가 APEC 참석을 위해 한국을 방문하기로 한 것은 외교적 성과로 홍보됐지만, 정작 그는 APEC 본회의에는 참석할 계획이 없다.

APEC을 단지 다른 목적을 위한 ‘도구’로 취급하는 것은 APEC에도, 한국의 장기 외교 전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헤징은 단기적으로는 생존 전략이 될 수 있지만, 미·중 경쟁이 단순한 물질적 경쟁을 넘어 정치체제 간 대결로 번지면서 세계가 점점 ‘흑백논리’로 재편될수록 ‘회색지대’에 머무는 것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이 대통령도 트럼프와의 회담 후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서 한 연설에서 이렇게 인정했다. “이제 그런 논리를 유지하기란 더 이상 불가능하다”

만약 실용 외교가 아니라면, 한국은 어떤 외교 전략을 추구해야 할까. APEC이 해답을 제시한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패러다임 아래에서 한국의 외교적 지렛대가 약해진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전후 아시아에 형성된 ‘허브 앤 스포크(hub-and-spokes)’동맹 체제 때문이다. 여기서 아시아 각국은 미국이라는 중심 ‘허브’와 개별적인 양자 동맹 관계를 유지하는 ‘스포크(바큇살)’로 기능한다. 이런 구조는 아시아 각국 간의 역사적 앙금과 공통된 안보 위협의 부재를 고려하면 그럴듯해 보였을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권력의 비대칭을 초래한다. 후견국이 전통적 동맹 요구를 넘어서는 압박을 가하면 각 나라는 고립된 채로 취약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은 결코 고립된 국가가 아니다. APEC은 1980년대 후반,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이 역내 경제협력의 이점을 인식하면서 탄생했다. 한국은 세 번째 개최국이었다. APEC의 회원은 국가 단위가 아니라 ‘경제체제’ 단위로 구성돼 있으며, 이는 정치적 경계를 넘어 자유무역과 시장 혁신을 증진하겠다는 의지를 뜻한다. 지난 36년 동안 APEC은 역내 새로운 산업 시장을 개척하고, 교역 비용을 크게 줄였으며, 역내 기업 간 협력을 촉진했다. 이는 세계 경제 부문에서 가장 성공적인 다자협력체 중 하나이며, 한국은 그 핵심적 역할을 맡아왔다. 한국의 전체 수출 중 약 75%, 수입 중 약 68%가 APEC 회원 경제권과의 거래다.

2025년 APEC의 개최국으로서 한국은 APEC의 사명을 심화시키면서 동시에 자국의 외교적 가치를 높일 거대한 기회를 갖고 있다. 단순한 회의 주최국이 아니라 ‘비전 제시자’로 규정해야 한다. 공급망 불안, 인공지능(AI) 붐, 인구 구조 변화는 단순한 의제 목록이 아니라 혁신적 해결책을 요구하는 상호 연관된 도전 과제들이다. AI 붐을 어떻게 포용적으로 활용해 역내 경제 간 신뢰를 구축할 수 있을까. 지속 가능한 에너지 개발과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를 조화시킬 수 있을까. 고령화 경제에 위협이 아닌 해법으로서의 AI 모델을 한국이 제시할 수 있을까.

한국은 이러한 글로벌 경제 과제의 해법을 선도할 만한 독보적 위치에 있다. 현재 한국은 OECD 국가 중 가장 심각한 출산율 위기를 겪고 있다. 이는 당장은 어려움이지만, 동시에 한국이 세계의 고령화 국가들이 참고할 정책적 해법의 최전선에 설 수 있음을 뜻한다. 정부와 민간 부문 간의 밀접한 관계는 국가 주도 성장 시대의 유산으로 자유주의적 시각에서는 약점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공급망 혼란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는 ‘민관 협력형 기동성’의 원천이기도 하다. 이는 다른 경제권에도 참고가 될 만한 모델이 될 수 있다.

‘K-팝 데몬 헌터스’의 세계적 인기는 흥미로운 외교적 소재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의 깊은 문화적 창의성과 공감 능력이 있다. 한국은 이를 다자간 연구개발(R&D)프로젝트나 창업 협력 사업으로 확장해, 역내 중소 무역 파트너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APEC 내 최대 두 경제체제(미국과 중국) 간 경쟁으로 인해 ‘아시아·태평양 자유무역지대(FTAAP)’ 실현은 여전히 복잡하지만, 한국은 이미 강점을 가진 디지털 부문 등에서 보다 지역화된 자유무역지대 설립을 주도해야 한다.

경제 혁신을 통해 다자협력 역량을 입증할수록, 한국은 미·중 경쟁의 변덕에 덜 휘둘릴 것이다. 한국은 실용주의를 버릴 필요가 없다. 다만 실용주의를 전략적 전술이 아닌 ‘가치의 원칙’으로 접근해야 한다. 불확실한 시대에 한국에 필요한 진정한 실용주의란, 대립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의 경제적 강점을 조용하고도 자신 있게 강화해 역내 연결의 허브로 부상하는 것이다.

아시아의 ‘허브 앤 스포크’ 동맹 구조가 당장 바뀌진 않겠지만, 각 스포크가 서로 긴밀히 연결되면 그 구조는 ‘네트워크형 동맹’으로 진화한다. 미국이 여전히 그 중심에 있을 수는 있겠지만, 파트너 국가들은 양자 관계 이상으로 더 큰 집단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아시아·태평양의 파트너 국가들은 문화적 정체성과 정치 체제 면에서 다양하지만, 새로운 세계 질서 속에서 공통의 목표를 공유한다. 바로 ‘경제 회복력’이다. 한국은 APEC과 같은 노력을 통해 역내 파트너 국가들과의 연결망을 최대한 두텁게 만들어야 한다.

혹시라도 APEC을 전후해 예정된 트럼프-시진핑 회담이 희토류 분쟁으로 막판에 무산될 수도 있다. 혹은 그것이 뜻밖의 트럼프-김정은 회담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APEC의 가치는, 그리고 2025년 개최국으로서 한국의 성공은 그런 불확실한 변수들에 좌우돼선 안 된다.

허아람은 누구

아시아의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연구하며 미국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저서인 ‘시민 의무의 서사: 국가 이야기들이 아시아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형성하는가(Narratives of Civic Duty: How National Stories Shape Democracy in Asia)’는 2023년 미국정치학회(APSA)의 로버트 A. 달(Robert A. Dahl Award) 상을 수상했다. ‘민주주의 주제에 대한 최고 수준의 학문적 연구’에 주는 상이다. 그는 주요 싱크탱크, 국제 언론, 미 국무부에서 아시아·민주주의 관련 사안에 대한 전문가 패널로 자주 활동하고 있다. 아울러 플레처아시아포럼의 창립 디렉터이며, 2021년엔 코리아소사이어티에서 뽑은 ‘셔먼 신진 학자상(Sherman Emerging Scholar Award)’의 주인공이었다. 2018~2019년엔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선정한 한미 차세대 학자(U.S.-Korea NextGen Scholar)로 뽑혔다. 스탠퍼드대에서 우등으로 학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공공정책 석사(MPP)학위를, 프린스턴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