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치매머니 154조…보험금청구권신탁 확대 ‘자산관리 열쇠’

헤럴드보험대상 30주년 기획②
치매자산 급증에도 관리제도 미비
사망보험만 신탁 가능, 활용 한계
해외선 간병비 자동 관리 제도화
전문가 “생존보험금까지 확대 필요”


서울 서초구에 사는 김 모(72) 씨는 최근 치매에 대비해 노후 자산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평생 모은 보험금과 연금으로 노후를 버틸 계획이었지만, 혹시 모를 판단 능력 저하에 대비해 자산을 안전하게 관리할 장치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김 씨는 자신이 가입한 개인연금을 신탁으로 관리할 수 있을지 알아봤지만, “현행 제도는 사망보험금에만 한정돼 신탁이 불가능하다”는 답을 들었다. 그는 “치매나 요양 같은 상황을 미리 대비하려 해도, 내 노후를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상품이 많지 않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른바 ‘치매머니’로 불리는 고령층 자산이 급격히 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자산을 체계적으로 보호하고 분할 관리할 수 있는 제도는 여전히 걸음마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치매나 요양 같은 생존 리스크가 커지고 있는데, 현행 제도로는 보험사가 가입자의 자산을 실질적으로 관리해 줄 수 없다”며 “보험금청구권신탁이 사망보험에만 머물러 있는 현실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29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국내 65세 이상 치매 환자는 약 97만명으로, 전체 노인의 10명 중 1명꼴이다. 치매 환자가 보유한 자산 규모는 154조원, 2050년에는 488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추정된다. 자산은 늘어나지만 이를 안전하게 관리할 제도는 여전히 미비하다.

특히 독거노인이나 부부 중 한쪽이 치매를 진단받은 경우, 금융계좌나 보험금을 적시에 관리하지 못해 자산이 방치되는 사례가 잇따른다. 고령자의 금융사고 피해액은 연간 2조원을 넘어섰다. 보험업계가 신탁을 활용해 노후 자산을 관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사망보험금만 가능한 현 제도…해외는 이미 ‘치매머니 신탁’ 제도화=보험금청구권신탁은 보험 가입자가 사망했을 때 보험금이 수탁기관을 통해 지정된 수익자에게 분할 지급되도록 하는 제도다. 피보험자 사망 후 미성년 자녀나 장애인 가족에게 보험금을 일정 기간 나눠 지급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도입 당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현실적 제약이 많다. 신탁 설정은 사망보험금만 가능하고, 최소 3000만원 이상 금액 요건, 수익자 범위 제한 등 까다로운 조건이 붙는다. 그 결과 간병비·생활비 등 실제 치매머니 관리에는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한 생명보험사 관계자는 “현재 청구권신탁은 사실상 예금처럼 ‘보관’하는 수준에 그친다”며 “보험이 진정한 노후 자산관리 역할을 하려면 ‘관리형 신탁’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해외에서는 보험과 신탁이 결합한 다양한 모델이 활성화돼 있다. 미국은 생명보험 계약을 신탁에 편입해 상속세를 줄이고, 치매나 중증 질환 발병 시 신탁을 통해 간병비를 자동 지급하도록 설계할 수 있다.

일본은 성년후견제도와 신탁을 결합한 ‘후견지원신탁’을 통해 치매 환자의 자산을 수탁기관이 대신 관리한다. 법원이 관리·해약 절차를 감독해 금융사기 위험을 차단한다. 일본의 후견지원신탁 이용자는 이미 8만 명을 넘어섰으며, 노인 복지정책의 핵심 제도로 자리 잡았다.

국내에서도 제도 개선 움직임이 시작됐다. 김규동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은 ‘고령화 시대 신탁 활성화를 위한 보험의 역할 보고서’에서 “사망보험금에 한정된 현 제도를 치매보험, 건강보험, 연금보험 등 생존보험금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실제 고령자 자산 중 저축성보험 비중은 약 20%로, 연금보험·보장성보험을 포함하면 노후 현금흐름의 상당 부분이 보험에서 나온다. 이 자금이 신탁으로 편입되면 치매 진단 이후에도 간병비나 생활비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된다.

▶“보험금청구권신탁, 치매머니 시대의 안전장치”…‘자산관리형 보험’으로 진화 시급=금융업계에서는 보험금청구권신탁을 ‘보관형’에서 ‘관리형’으로 바꾸는 것이 핵심이라고 본다. 재신탁 허용, 운용 수익 인정, 소득공제 등 세제 혜택을 부여해 실질적인 자산관리 인프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신탁과 결합한 ‘관리형 보험’이 초고령사회 핵심 대비책으로 꼽히고 있다. 한 생보사 관계자는 “고객이 치매나 중증질환으로 판단 능력을 잃더라도 보험금이 신탁을 통해 자동 관리되면 가족 간 분쟁이나 금융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며 “보험사가 단순한 보상기관이 아닌 고령자 자산관리 파트너로 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험과 신탁의 경계를 허물면 보험금이 단순한 ‘지급금’이 아니라 ‘복지자금’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정부 역시 보험과 신탁을 결합한 고령층 자산관리 모델에 주목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잘 만들었다”며 사망보험금 유동화 제도를 긍정 평가했다. 이 제도는 오는 30일부터 삼성생명·한화생명·교보생명·신한라이프·KB라이프 등 5개 생명보험사가 55세 이상 종신보험 계약자를 대상으로 사망보험금의 일부를 연금 형태로 선지급받을 수 있는 상품을 출시하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업계에서는 이를 ‘생전 자산 활용 모델’, 보험금청구권신탁을 ‘사후 자산 관리 모델’로 구분하며, 두 제도가 고령사회 금융복지 인프라로 자리 잡을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이제 보험은 단순히 위험을 보상하는 산업이 아니라, 노후 자산을 관리하고 돌보는 산업으로 진화해야 한다”며 “보험금청구권신탁은 그 전환의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