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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 기록 없는 나라”…런베뮤, 과로사 진실 가리는 ‘보이지 않는 시간’

‘주 80시간’ vs ‘주 44시간’…입증 불가능한 노동시간 공백
정부, ‘근로시간 측정·기록 의무제’ 추진…노동계는 “필요성 공감하지만 감시 우려”

30일 서울 종로구 런던베이글뮤지엄 안국점 앞에서 정의당 관계자들이 청년 노동자 과로사 규탄 및 책임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런던베이글뮤지엄 인천점에서 근무하던 A(26)씨는 지난 7월 회사 숙소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유족 측에 따르면 A씨는 신규 지점 개업 준비와 운영 업무를 병행하며 극심한 업무 부담을 겪은 것으로 전해졌다. [연합]

[헤럴드경제=김용훈 기자] “주 80시간 일했다.” “사실이 아니다.”

20대 청년의 죽음 앞에서 유족과 회사의 주장이 극명하게 엇갈렸다. 그러나 어느 쪽의 말이 진실인지를 밝힐 객관적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출퇴근 기록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한 노동자의 시간이 법적 증거 밖으로 사라진 셈이다.

지난 7월 인천의 한 런던베이글뮤지엄 매장에서 근무하던 고(故) 정효원 씨(26)는 회사 숙소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유족은 “사망 전 일주일간 80시간 넘게 일했다”며 과로사로 인한 산업재해를 신청했지만, 회사는 “평균 주 44시간 근무였다”고 반박했다.

문제의 본질은 ‘누가 맞느냐’가 아니라,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 한국의 법제도 안에서는 실제 근로시간을 입증할 체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근로시간 기록 의무 없는 나라

2일 국가법령정보센터에 따르면 현행 근로기준법 어디에도 사업주의 출퇴근 기록 의무는 없다.

사용자는 ‘근로시간을 적정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원칙만 지키면 된다. 법 제50조는 “근로시간은 1일 8시간, 1주 40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제53조는 노사 합의 시 주 12시간 이내의 연장근로를 허용하지만, 이 시간을 어떻게 산정·기록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은 빠져 있다.

즉, ‘근로시간 상한’은 존재하지만 ‘근로시간 기록’은 법적으로 강제되지 않는 구조다. 노동자의 업무 시작·종료 시각을 전자적으로 측정하거나 일정 기간 보존해야 한다는 규정도 없다.

결국 장시간 근로, 임금체불, 과로사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도대체 하루에 몇 시간을 일했느냐”는 질문이 반복된다. 노동자가 살아 있다면 진술이라도 할 수 있지만, 사망하거나 의식이 없는 경우 유족은 카카오톡 메시지, 휴대전화 위치기록, 동료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 탓에 기록 없는 노동은 증거 없는 죽음으로 이어진다. 김수현 공인노무사(법무법인 더보상)는 “과로사 사건은 대부분 근로시간 입증이 쟁점이지만 지금 구조에선 양측 주장만 남는다”며 “출퇴근기록 의무화 없이는 진실공방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정부, ‘근로시간 측정·기록 의무제’ 추진…국정기획위도 과제로 포함

이 같은 구조적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근로시간 측정·기록 의무제’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2030년까지 한국의 평균 노동시간을 OECD 평균 이하로 낮추겠다”고 밝히며, 그 방법 중 하나로 사용자의 실근로시간 기록 의무화를 공약했다. “공짜 야근을 없애기 위해선 근로시간의 객관적 기록이 필요하다”는 취지다.

국정기획위원회가 발표한 국정과제에도 이 내용이 명시됐다. 정부는 포괄임금제 남용과 장시간 근로를 줄이는 핵심 수단으로 “사업주에게 근로시간 측정·기록 의무를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고용노동부 역시 “출퇴근 기록이 확보돼야 근로시간 단축 정책이 작동한다”며 관련 연구용역을 진행 중이다.

당국은 근로시간 관리의 객관성을 높이는 동시에, 포괄임금제 관행 속에서 ‘실근로시간=계약서상 근로시간’으로 처리되는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구상이다.

국회에도 이미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이 안에 따르면 사용자는 근로자의 업무 개시·종료 시각을 전자정보처리시스템 등 객관적 방법으로 측정·기록해야 하며, 측정이 어려운 경우 근로자가 직접 기록하는 ‘자기신고제’를 병행할 수 있다. 이 기록은 일정 기간(예: 3년) 동안 보존해야 한다.

해외선 ‘근로시간 기록’이 상식...감시 우려도

근로시간 기록은 이미 대부분 선진국에서 법적 의무다. 유럽사법재판소(ECJ)는 2019년 “근로시간 기록 시스템이 없으면 근로시간과 초과근무를 객관적이고 신뢰성 있게 확인할 수 없다”며 모든 회원국에 근로시간 기록 시스템 구축을 명령했다.

이 판결은 근로자의 건강권과 휴식권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로 평가받는다. 미국의 공정근로기준법(FLSA)도 사용자의 근로시간 기록·보존 의무를 명시하고 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근로기준법 역시 하루 단위 근로시간 기록을 의무화했다. 한국만 여전히 “노동자가 얼마나 일했는지”를 추정에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경영계는 이 제도 시행에 강하게 반발한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업종별 근무 형태가 제각각인데 일률적인 기록 의무를 부과하면 행정비용만 늘어나고 유연근로제와 재택근무는 위축될 ”이라고 주장했다.중소기업계도 비슷한 입장이다. “출퇴근 시스템을 설치할 예산과 인력이 부족한 영세사업장은 오히려 법 위반자로 낙인찍힐 수 있다”며 현실적 보완책을 요구했다.

게다가 노동계 역시 이번 제도의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실행 방식에는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다. “사실상 ‘노동시간 감시제도’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는 우려 탓이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이번 런던베이글뮤지엄 사건이 ‘근로시간 입증 불가 구조’를 드러낸 상징적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노동계 관계자는 “한국의 과로사 인정 기준이 근로시간 증가율에 근거하지만, 정작 근로시간을 증명할 제도적 장치가 없다”며 “법은 있지만 근거가 없는 모순된 구조”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