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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균 그 후, 돌아온 전혜진 “신이 미웠지만, 어쩔 수 없음” [고승희의 리와인드]

국립극단 ‘안트로폴리스’ 5부작 ‘라이오스’
1인 18역, 105분 원맨쇼로 장악한 전혜진

연극 ‘라이오스’에서 1인 18역의 원맨쇼를 선보인 배우 전혜진 [국립극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그때, 라이오스의 나이 너댓살. 테베의 왕은 그가 보는 앞에서 양아버지 리코스(외삼촌)의 팔과 다리를 도끼로 찍어버린다. 소년은 숲에 버려진다. 그는 짐승처럼 숲에서 살아갔다.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배고픔에 미쳐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먹는다. 개미, 달팽이, 애벌레, 구더기… 수많은 벌레를 미친듯이 잡아먹었다. 따뜻한 숨결이 남은 멧돼지의 뱃가죽을 찢어 노란 기름을 퍼먹고, 김이 모락모락나는 내장을 꺼내 먹었다. 살기 위해 몸부림 쳤던 소년 라이오스. 그는 오이디푸스의 아버지다. ‘아비를 죽이고, 어머니의 자식을 낳는’ 비극의 주인공. 소년 라이오스는 대체 어떤 원죄를 안았기에, 이토록 끔찍한 생을 살아야 했을까.

배우 전혜진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사를 읊는다. “그 순간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봅니다. 아버지는 입을 열지만 그 입에선 단 한 마디도 쉽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독일 극작가 롤란트 쉼멜페니히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국립극단의 ‘안트로폴리스’ 5부작 중 ‘라이오스’ 무대다. 1인 18역의 원맨쇼를 마치자, 객석에선 아이돌 가수들의 얼굴을 찍는 대포 카메라가 등장했다. 노인부터 아이까지, 여기에 내레이터 격인 배우 전혜진 자신까지 연기하자, 무대는 공교롭게도 전혜진과 그리스 비극을 병치한다. 게다가 이 무대는 12년 전 남편 이선균과 함께 연극 ‘러브, 러브, 러브’를 올렸던 곳이다.

“처음엔 신이 너무 미웠어요. 순환의 고리 안에 있는 라이오스에 대한 측은함도 컸고요.” (전혜진)

멧돼지의 살점과 내장을 뜯어 먹은 뒤, 얼굴에 동물의 피를 덕지덕지 묻히던 모습은 그날의 전혜진에게서 즉흥적으로 나왔다. 그는 단 한 마디로 이 장면을 설명한다. 그 험한 날들을 목도하고 내버려졌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전혜진이 연극 무대로 돌아온 것은 2016년 ‘거기’ 이후 10년 만이다. 지난 2023년 12월 남편 이선균이 세상을 떠난 뒤 공백기를 가졌고, 지난 3월 ENA 드라마 ‘라이딩 인생’을 통해 돌아왔으나 라이브 무대를 통해 대중과 만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연극은 온전히 배우 전혜진에게 의존해 105분을 이어간다. 전혜진은 1인 18역으로 무대를 종횡무진 누비며 그야말로 팔색조 배우의 면모를 끄집어낸다.

‘안트로폴리스’ 5부작 중 2부인 ‘라이오스’의 주연을 맡은 배우 전혜진 [국립극단 제공]

오이디푸스 아버지인 라이오스의 삶은 내내 무대 밖에 있었다.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죄의 씨앗으로 낙인찍힌 오이디푸스의 생은 시대를 넘나들며 수천년간 이어졌지만, 정작 그를 잉태해 세상에 내놓은 아버지는 오랜 세월 잊혀졌다.

라이오스는 ‘안트로폴리스’ 5부작 중 2부에 해당한다. 에우리피데스,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의 그리스비극을 재해석한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원작이 없는 창작물이다. 작품은 ‘라이오스’의 성장 서사이자 ‘오이디푸스’의 프리퀄 격으로, 아버지였던 소년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만 보여준다.

연극은 앞서 1부 ‘프롤로그/디오니소스’와 연결고리를 갖는다. 결국 이야기는 ‘신들의 신(神)’ 제우스로부터 시작한다. 제우스의 난잡한 종족 번식 행위가 이 모든 이야기의 씨앗이 됐다.

에우리피데스의 ‘박코스의 여신도들’을 원작으로 삼았던 1부는 도시 테베의 탄생과 디오니소스 서사를 보여준다. 제우스가 납치한 페니키아의 왕 아게노르의 딸 에우로파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선 오빠 카드모스가 동생을 찾지 못하고 용과 싸워 테베를 건국한 이야기가 바로 프롤로그다.

테베 건국 후 하르모니아와의 사이에서 5남매를 낳은 카드모스. 그 중 딸 세멜레가 제우스의 간택을 받아 생명을 잉태한다. 하지만 제우스의 모습을 보고 세멜레가 불타 죽자 신은 태아를 꺼내 자신의 허벅지에 품는다. 그렇게 태어난 자가 디오니소스다.

윤한솔이 연출한 ‘안트로폴리스’ 1부는 한 마디로 요약하면 ‘스불재’(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가깝다. 신(神)을 부정하는 인간의 오만이 불러온 재앙이 주된 서사. 이야기는 내내 신을 부정하는 자들을 경고한다.

김수정 연출의 2부 ‘라이오스’는 카드모스의 5남매 중 막내 폴리도로스의 손자이자 적통 왕손인 라이오스의 이야기로 향한다. 18명의 배우가 꾸몄던 1부와는 정반대로 한 명의 배우가 18명의 인물을 연기한다.

배우 전혜진 [국립극단 제공]

전혜진의 존재감은 단연 압도적이다. 지난 몇 년 사이 드라마와 영화에서만 보던 스타들이 무대로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때때로 무대가 요구하는 연기 톤과 동선의 활용이 어색한 배우도 적지 않았으나, 전혜진은 연기로 압살할 만한 무대를 보여줬다.

배우 전혜진으로 존재했다가, 4세 아이부터 10~20대의 철딱서니 없는 반항아, 테베의 꼰대 노인까지 넘나든다. 심지어 그리스 로마 신화와 비극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모습은 스타강사 설민석 못지 않다.

“그런데 그게 정말일까요?”, “우린 알 수 없죠”라며 신화를 입은 비극적 서사에 의문을 제기하는 담담한 독백과 내레이션은 관객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머리를 쓰게 만든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표정과 목소리로 배역을 갈아입는 모습에선 TV나 영화 속 비슷한 캐릭터 안에 갇혔던 배우 전혜진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전혜진은 “경상남도 사투리에 쉰 목소리를 내는 노인 시민이 가장 힘들면서도 애착이 가는 캐릭터였다”며 “사투리와 표준어를 매치해 계속 연습했다”고 관객과의 대화에서 털어놨다.

연극은 그리스 비극 안에 절묘하게 2025년의 대한민국을 가져온다. 신화와 비극을 그 시대의 이야기로 두기보단 적극적으로 현재의 이야기와 연결한 것이다. 신탁에 좌지우지되는 비극 속 인물들의 삶에 무속에 환장했던 전 대통령 부부를 소환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연극 ‘라이오스’ 전혜진 [국립극단 제공]

“한 예언자가 떠들어댄 말이 한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게 된다면 누가 나라를 통치하게 되는 걸까요? 손바닥 한가운데에 ‘왕’자를 써라, 멀쩡한 궁전의 터가 안 좋으니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라도 궁전을 한강 근처로 옮겨라, 백성들이 말을 잘 안 들으면 총구를 겨눠서라도 혼을 내주어라! 신의 예언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배우 전혜진은 질책하듯 대사를 읊다, 한숨 고르더니 ‘신의 예언은 사실 내 안에서 너무나 간절하게 욕망하던 것 중 하나가 아니었겠냐”고 단호하게 묻는다. ‘라이오스’를 관통하는 주제의 밑바닥에 숨은 내밀한 진실을 길어 올리는 대사다.

다시 라이오스의 이야기로 돌아가, 그의 가여운 얼굴을 본다. 아무 죄 없이 태어나, 살아남기 위해 짐승의 내장을 물어뜯던 아이. 하지만 그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아들에 의해 살해될까 봐 두려워서 아들을 죽이려고 한 자’, 결국 ‘아들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된 자’로 적힌다. 라이오스의 비극은 그가 아무런 과오가 없는 데도 찾아왔을까. 그는 끝끝내 가여운 소년이었을까. 전혜진이라는 배우의 강점은 연출의 의도와 작품의 맥락,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떠먹여 주듯 연기한다는 데에 있다.

김수정 연출가는 “비극과 폭력이 왜 계속되는지, 이를 우리가 과연 끊어낼 수 있는지 묻는 작품”이라고 ‘라이오스’에 대해 말했다. 비극을 반복하는 인간의 망각,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누군가를 탓하기 일쑤인 삶, 신을 능멸하는 오만 등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결국 오늘의 광기와 폭력, 비극의 원흉이라고 연극은 말한다.

배우 전혜진 [국립극단 제공]

전혜진이 어조와 억양을 달리하며 복선을 깔듯 의도를 던지고, 종국엔 메시지를 드러낸다. 라이오스를 숲에서 구한 피사 왕국 펠롭스 왕의 아들 크리시포스를 납치해 테베로 데려온다. 라이오스에게 강간당해 크리시포스가 자살하자, 펠롭스 왕의 격노는 신에게 가닿는다. 자식처럼 돌봐줬던 라이오스의 배은망덕에 울분을 토하며 ‘라이오스가 그의 아들 손에 죽기를 바란다’고 저주를 퍼붓는다. 그의 저주는 제우스가 접수한다. 펩롭스는 제우스의 손자였기 때문이다.

연극은 이 대목쯤 오면 절정으로 향한다. 라이오스는 자신의 인생을 ‘수수께끼’라며 “난 더 이상 잃을 게 없다”고, “이제 아무것도 나 상처를 줄 수 없다”고 했다. 비극으로 시작된 라이오스의 수수께끼는 잘못된 방식으로 답을 찾아간다.

“라이오스는 은혜를 베푼 사람한테 해서는 안 될 짓을 했습니다. 그의 자식한테까지 해서는 안 될 짓을 했습니다”라는 단호한 전혜진의 어조에서 관객은 라이오스에게 내려진 형벌의 이유를 찾아간다. “부모가 바로 살아야 자식이 똑바로 산다”는 대사를 통해 오이디푸스로 대물림되는 죄의 씨앗을 상기하고, 작금의 현대사를 버무려 지도자의 조건을 묻는다. 흥미로운 지점은 가수 장기하의 ‘가만 있으면 되는데 자꾸만 뭐 그렇게 할라 그래’라는 노래가 대사로 반복된다는 것이다. 신탁을 듣고 어떻게든 상황을 바꿔보려는 인간의 어리석은 행동력에 대한 질책이자 끊임없이 개인의 욕망을 위해 권력을 남용해온 위정자들을 향한 경고와도 같았다.

1인 18역으로 연기혼을 불태운 전혜진은 연극 말미 거대한 스크린을 거울처럼 마주한다. “이런 경험은 잘 없었던 것 같아, 그냥 라이오스의 생각을 많이 했다”고 말한다. “어쩔 수 없음. 살아야 되고, 또 아들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 너무나 큰 두려움에서도 살아야 하는 상황”을 생각했다는 배우의 이야기에서 불과 몇 년 사이 모진 풍파를 마주하고 견뎌낸 인간 전혜진을 보게 된다.

원맨쇼의 무대가 막을 내리자 객석에선 대포 카메라가 등장하고, 커튼콜을 마치면 관객들은 급한 일이라도 생긴듯 우루루 달려 나간다. 2층 계단을 허겁지겁 내려와 명동예술극장 출연자 입구를 에워쌌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전혜진을 만나 응원하려는 관객들의 열띤 지지에 전혜진 파워는 다시금 입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