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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은 단일 기업에 27조 쏟는데…韓은 낡은 규제에 대형 투자 난항 [AI 패권 전쟁①]

AI 경쟁에 주요국 정책수단 총동원
日, 반도체 패권 회복 위해 파격 지원
대만, 농업용수 돌리고 인력난 해소
美, 민관 합동 투자로 국가 차원 대응
韓, 낡은 규제에 막혀 초대형 투자 실기
韓, OECD 국가 중 금산분리 규제 가장 강해

경기도 국립과천과학관 미래상상SF관에 전시된 반도체 웨이퍼.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음. [연합]

[헤럴드경제=고은결·박혜원 기자] 인공지능(AI)·반도체 패권 경쟁이 국가 간 총력전으로 번지는 가운데, 한국은 낡은 규제에 막혀 초대형 투자를 제때 집행하지 못한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대기업집단 규제 등 구조적 제약 탓에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의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단 지적이다. 특히 대규모 자본을 단기간에 투입해야 하는 전략 산업 특성상, 금산분리 규제가 자금 조달 구조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금융·산업 자본의 유착을 막기 위해 금산분리 규제를 본격 강화해 왔는데, 최근 초대형 투자가 필요한 분야에서는 이 같은 규제가 기업의 자금 조달 능력을 제약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 제도에서는 지주사 체제를 가진 대기업이 직접 펀드 운용사(GP) 역할을 할 수 없고, 은행 대출이나 회사채 발행만으로는 속도와 규모 모두 글로벌 경쟁에 맞추기 어렵다. 한 번에 대규모 투자자금을 끌어들여 투입하는 구조를 만들기 어렵다는 뜻이다.

규제에 발목 잡힌 초대형 투자

이런 상황에 재계에서는 자본 동원 속도가 경쟁력을 결정하는 만큼 시장 변화에 맞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재명 대통령도 최근 샘 올트먼 오픈AI 대표와의 면담 뒤 전략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금산분리 규제 완화 검토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 현재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금산분리 규제가 가장 강한 나라로 꼽히는 반면, 일본과 유럽연합(EU) 국가 상당수는 사실상 금산분리 규제를 두지 않고 있다.

정부는 여전히 규제 완화에 대한 신중론을 유지하고 있다.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금산분리 규제 완화 논의에 대해 검토는 가능하지만 최후의 수단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투자 활성화 필요성에는 공감한다”면서도 “바꾸려면 분명한 이유와 부작용 방지 방안,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산업계의 요구와 정책 당국의 신중론이 충돌하며, 한국이 글로벌 전략산업 경쟁에서 적기 대응할 수 있느냐는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각국 정부의 총력 지원

일본은 단일기업에 27조원 투자

반면 주요국은 전략산업 주도권 확보를 위해 기업에 대한 지원사격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가 단일 기업인 라피더스에 지금까지 지원했거나 오는 2028년까지 지원을 결정한 총 금액은 27조원대다. 우리나라가 내년도 인공지능(AI) 분야 전체에 편성한 예산(총 10조1000억원)의 3배에 달하는 규모다. 일본 정부는 2022년 삼성과 TSMC를 잡기 위해 현지 기업 8곳이 뭉친 라피더스가 출범 이후, 반도체 재건을 국가 차원의 핵심 과제로 끌어올렸다. 이에 시제품 생산과 2나노 공정 개발을 위해 장비·시스템 구축 비용을 직접 뒷받침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민간 금융권 대출까지 정부가 보증하겠다는 파격 조치까지 마련했다. 한때 세계를 주름잡던 일본 반도체 산업이 경쟁국에 잇따라 추월당하자 위기감이 극심해졌고, 급기야 산업 전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판단에 일본 정부가 움직인 것이다.

대만은 이미 수년 전부터 반도체 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규정하고 유연한 정책 지원을 이어왔다. 2021년 기록적 가뭄에도 농업용수를 돌려 TSMC 공장에 우선 공급했고, 반도체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대학이 반도체 전공 신입생을 6개월마다 선발하도록 제도를 바꿨다. 2023년에는 ‘대만판 반도체법’을 통과시켜 전략산업 연구개발비의 25%, 시설투자의 5%를 세액 공제하며 기업 투자를 직접 자극했다. 정부 산하 공업기술연구원(ITRI)을 중심으로 반도체 생태계를 일찍부터 육성해온 구조 속에서 TSMC·폭스콘·미디어텍 등이 글로벌 공급망을 주도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국가 주도형 경쟁 구도 자리잡아

미국도 행정부 차원의 ‘국가 프로젝트’로 대응하고 있다. 미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취임 직후 오픈AI·소프트뱅크·오라클 등이 제안한 초대형 AI 인프라 구축 계획을 국가 전략사업으로 흡수해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출범시켰다. 2025~2029년 동안 미국 전역에 데이터센터·반도체 생산기지·클라우드 인프라를 확충하는 구상으로, 총 450조원 규모의 민·관 합동 투자가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질 전망이다. 이 프로젝트는 현지 에너지 인프라 확충과 신산업 육성 정책과도 맞물려 추진되며 파급력이 확산될 전망이다.

배터리와 신재생에너지 등에서 이미 대규모 정부지원 경험이 있었던 중국은 중앙정부는 물론 상하이시와 저장성 등 지방정부에서도 공격적인 AI 지원책을 내놓으며 수백조원 규모의 AI 투자를 예고했다. 각국은 방식은 달라도 규제를 풀고, 세금을 낮추고, 공공 재정을 동원해 전략 산업을 밀어올린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정부가 산업 성장의 속도를 직접 끌어올리는 국가 주도형 경쟁 구도가 빠르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도 성장산업 투자를 통해 글로벌 경쟁에 뛰어들려면 다양한 규제 손질이 불가피하다고 강조한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대기업 규제가 강한 편인데, 적극 개발하는 기업에 대한 세액공제 확대, 중소기업 기술개발 연속성을 위한 가업상속 규제 완화 등 폭넓은 지원책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민수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는 “미국의 스타게이트나 일본의 라피더스 등 국가 단위 프로젝트에 비해 지원 규모가 부족하다”며 “AI는 시장 선점이 중요하기 때문에 선도 기업에 대한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