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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연기해도 부족해”…‘국민 아버지’ 이순재 별세

25일 새벽 향년 91세로 영면
대학 시절 영화 ‘햄릿’에 매료
KBS 개국 드라마로 방송 데뷔
제14대 서울 중랑갑 의원 당선
최근까지 연극 배우·연출 도전
李대통령 “수많은 후배에 귀감”

현역 ‘최고령 배우’로 활동해온 배우 이순재가 별세했다. 사진은 2021년 연극 ‘리어왕’ 출연 당시 모습 [연합]

“배우로서 연기는 생명력이다. 몸살에 걸려 누워있더라도 ‘레디 고’ 하면 벌떡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연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늘 고민하고 연구한다. 연기는 잘할 순 있어도 완성은 없다.”

지난해 5월 백상예술대상 특별무대에 선 배우 이순재는 60년 이상 배우 생활을 해도 아직 연구해야 할 게 많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평생 연기해도 아직 모자란다”고 말했던 그는 늘 마지막 무대인 것처럼 연기했고, 그의 연기 인생은 이제 막을 내렸다.

25일 새벽 국내 최고령 배우 이순재가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령에도 방송과 영화, 연극 무대를 오가며 활동을 이어온 고인은 지난해 말 건강 이상설에 휩싸여 출연 중이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활동을 중단했다. 이후 KBS 2TV 드라마 ‘개소리’를 통해 다시 얼굴을 비췄으나 그해 연기대상 시상식을 끝으로 안정을 취해왔다.

고인은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부친과 함께 중국 지린성 옌지로 이주했다. 4살 때 조부모를 따라 서울로 내려온 뒤로는 쭉 조부모의 손에서 자랐다. 호적상으로는 1935년생이다. 서울대 철학과에 진학한 고인은 그 시절 영화에 푹 빠졌고, 영국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가 출연한 영화 ‘햄릿’을 보고 배우의 길을 걸었다. 1956년 연극 단체 ‘떼아뜨르 리브르’에 입단, 유진 오닐의 희곡 ‘지평선 너머’를 통해 데뷔하며 연기 인생이 시작됐다. 1960년 대학 졸업 후엔 국내 최초 동인제 극단 ‘실험극장’에서 활발한 연극 활동을 이어갔다.

이듬해 KBS 개국 드라마인 ‘나도 인간이 되련다’에 출연하며 방송계에 입문했고, 1965년 TBC 1기 전속 배우가 된 이후 한국 방송의 살아있는 역사가 됐다. 한 달에 30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 무수히 많은 작품에 이름을 올렸다. 대표작만 해도 ‘동의보감’, ‘보고 또 보고’, ‘삼김시대’, ‘목욕탕집 남자들’, ‘야인시대’, ‘토지’, ‘엄마가 뿔났다’ 등 140편에 달한다.

특히 1990년대엔 MBC ‘사랑이 뭐길래’(1991∼1992)를 통해 가부장 아버지의 초상을 따뜻하면서도 코믹하게 그려내며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당시 이 드라마의 시청률은 무려 65%에 달했다.

드라마의 인기로 고인은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당시 여당인 민주자유당 후보로 서울 중랑갑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정치 활동을 하면서 드라마 ‘야망’, ‘작별’에도 출연했다. 이 시기 나온 KBS2 ‘목욕탕집 남자들’(1995~1996)도 국민 아버지 캐릭터를 이어받아 ‘우리 시대 가장’의 얼굴을 그려냈다.

‘허준’(1999), ‘상도’(2001), ‘이산’(2007) 등 대작 사극 드라마에서는 언제나 극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고인은 도전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연기 스펙트럼을 확장했다. 70대에 출연한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2006), ‘지붕 뚫고 하이킥’(2009)에선 근엄한 이미지를 지우고 젊은 세대에 가깝게 다가섰다. 이 때 ‘야동 순재’라는 별명이 생기며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

예능 ‘꽃보다 할배’(2013)에선 지치지 않는 체력과 의욕 넘치는 모습으로 ‘직진 순재’라는 별칭이 생겼다. 배우 이순재가 아닌 인간 이순재의 진면목과 가치관, 인생관을 만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그는 “나이 먹었다고 어른 행세하고 대우나 받으려고 주저앉아 버리면 늙어버리는 거고, 난 아직도 한다 하면 되는 것”이라며 늘 청춘을 사는 노배우의 자세를 보여줬다.

최근 10년 동안은 ‘장수상회’(2016), ‘앙리할아버지와 나’(2017), ‘리어왕’(2021) 등 연극 무대를 오가며 ‘방탄노년단’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특히 ‘리어왕’에선 200분 공연 동안 휘몰아치는 방대한 대사를 발음 하나 흘리지 않고 소화했다. 2023년엔 러시아 문호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를 통해 연출에 도전하기도 했다.

지난해엔 KBS 2TV 드라마 ‘개소리’를 통해 KBS 연기대상에서 ‘역대 최고령 대상 수상자’라는 기록을 남겼다. 최근까지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의 연기 열정을 미래 세대에게도 전수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페이스북에 ‘대한민국 문화예술계의 큰 별, 이순재 선생님의 명복을 기원한다’는 제목의 글을 올려 “모든 세대를 아우르며 사랑받은 예술인이자, 국민 배우였던 선생님을 오래도록 기억하겠다”며 추모했다.

이 대통령은 고인에 대해 “한평생 연기에 전념하며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품격을 높여온 선생님은 연극과 영화, 방송을 넘나들며 우리에게 웃음과 감동, 위로와 용기를 선사해 주셨다”며 “(그의) 연기에 대한 철학과 배우로서의 자세, 그리고 진정한 어른으로서의 인품은 수많은 후배에 귀감이 됐고, 나아가 우리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줬다”고 썼다.

이 대통령은 “선생님께서 남기신 작품과 메시지는 대한민국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전해질 것”이라며 “선생님의 표정과 목소리가 여전히 생생하다. 부디 평안히 쉬시라”고 글을 마쳤다. 고승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