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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파상·연탄·식모…소환된 기억에서 미래를 보다

베이비부머, 네 겹의 시간을 걷다 엄창호 지음 루아크

된장찌개를 끓이다 마지막에 넣을 두부가 없다며 동네 슈퍼에 간 엄마는 30분째 함흥차사다. 아마 그 구멍가게에서 같은 이유로 뛰쳐나간 옆집 엄마를 만났거나 슈퍼 주인에게 재미난 동네 소식을 들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으리라. 어제부터 말썽을 부리는 라디오를 고치려 집 앞 전파상에 갔더니 내부 부품을 갈아야 한단다. 돈이 꽤 들 것 같아 걱정했지만, 전파상 아저씨는 ‘단골 찬스’라며 소정의 수리비만 받았다.

1990년대 전후만 해도 이런 풍경은 일상적이었지만,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젠 대기업 브랜드 아파트에 파묻혀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고, 동네 사랑방이었던 슈퍼는 전국 어디서나 똑같이 생긴 편의점이 대신한다. 전자기기가 고장 나면 주변에 있는 전파상을 찾는 것보다 휴대폰을 열어 같은 제품을 주문하는 게 더 빠르다.

한국 사회는 지난 60여년간 빠른 속도로 변화, 발전해 왔다. 특히 이 시대를 살아온 베이비부머(1955~1974년생)는 농경사회와 산업시대, 정보화시대를 거쳐 AI(인공지능)시대까지 이른바 ‘네 겹의 시간’을 온몸으로 통과하며 변화의 과정을 목격했다. 베이비부머이면서 현직 시절 광고 일을 하며 트렌드 변화에 민감했던 저자는 신간 ‘베이비부머, 네 겹의 시간을 걷다’를 통해 작가 개인의 경험을 공동체 공통 경험에 투영시키며 사회·역사적으로 조명한다.

지금은 쓰지 않은 연탄은 저자에게 내 몸으로 느낀 첫 근대였다. 농촌에 살다 소도시로 이주한 저자의 가족이 연탄아궁이가 있는 셋방으로 이사를 가면서다. 전화 한 통이면 집까지 배달해 주고, 연기 없이 짧은 시간 내에 불을 피울 수 있는 연탄은 나무장작에 비해 그야말로 새로운 문명처럼 느껴졌을 터. 물론 기름, 가스보일러에 그 자리를 내줬지만, 연탄은 안도현 시 ‘너에게 묻는다’와 이철환 ‘연탄길’에서 보이듯 희생과 사랑의 상징이 된다.

보통 ‘00 누나’로 불리던 식모는 1950년대 시작된 전쟁의 산물이다. 1970년대 초 서울 전체 가구의 31.4%가 식모를 둘 정도로 식모살이가 성행했다. 저자는 식모라는 직업은 가난한 농경인에서 벗어나 근대적 시민으로 신분 상승하려는 소녀의 욕망과 다시 신분사회의 위계를 재현해 귀족의 지위를 누리려는 도시중산층의 욕망이 절묘하게 만나 탄생한 기형적 현상이라고 진단한다.

담배는 소년이 어른으로 넘어가는 통과 의례이자 교류와 소통의 매개체이면서 고독과 번민의 벗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질병, 퇴폐, 미개 등 부정적인 이미지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담배가 오로지 반문명적 상징으로만 남는, 이른바 ‘담배 의미의 일극체제’라 할 만하다. 40여년간 담배와 희로애락을 같이한 저자가 최근 금연을 시도한 것은 건강상의 이유가 아니라 ‘담배 의미의 일극체제’에 저항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토로한다. 신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