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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음보단 감정에 충실하게”…‘빨간펜 선생님’ 스켈톤, 소프라노 아리아도 거침없이~ [백스테이지]

‘헬덴 테너’ 스튜어트 스켈톤 마스터클래스
고음 집착 韓 젊은 성악가 고질병 꼬집어
“부드러운 게 강한 것”…벨칸토는 우아하게

국립오페라단 스튜어트 스켈톤 마스터 클래스에 참석한 소프라노 유태영/고승희 기자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노! 노노노노!!”

부드럽지만 단호한 한마디가 귀에 꽂히자 2030 새싹 성악가들 사이엔 긴장감이 감돌았다. 소프라노 유태영(23)이 앙브루아즈 토마의 오페라 ‘햄릿’에서 오필리아가 부르는 광란의 아리아인 ‘당신들의 놀이에, 친구들이여(a vos jeux, mes amis)’를 부를 때였다. 전설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가 자주 들려줬던 곡이다.

“정신을 잃은 여자를 표현하려는 것이니 극적인 변화를 잘 보이기 위해 이 방향, 저 방향 바라보는 것도 좋아요. 더 역동성 있게 표현해 볼까요?”

아름다운 목소리로 오필리아의 광증이 다시 시작됐다. 한 소절 한 소절 이어질 때마다 테너 스튜어트 스켈톤은 모나미의 빨간색 플러스펜을 지휘봉 삼아 선율을 그렸다. 다시 노래를 멈춰 세우고, 그는 외마디 ‘노(No)’와 함께 소프라노의 아리아를 부르기 시작했다. 음악은 직관적이다. 담백하고 고급스러운 테너의 음성이 오필리아의 혼란을 노래하자 MZ(밀레니얼+Z) 성악가들은 눈이 휘둥그레진다. 무엇이 다른지는 순식간에 간파된다.

놀라기는 일렀다. 급기야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스켈톤. 그는 대뜸 큰 손을 파르르 떨며 노래해 보라고 권한다. ‘날 믿어보라’는 말은 일타강사 못잖았다. 보다 많은 감정을 토해내고, ‘미쳐가는 여자’의 혼란한 상태를 보여주기 위해 비브라토를 더 많이 넣으라는 손짓이었다. 스켈톤은 유태영의 손을 붙들고 동작을 반복하게 했다. 두세 번의 반복 학습이 이어지자, 손의 떨림과 함께 소리는 금세 섬세해졌다. 스켈톤의 앞엔 스물셋의 앳된 학생이 아닌 광증에 휘감긴 아리따운 오필리아가 서있었다. 그제야 마침내, 만족스러운 선생님의 함성이 그제야 들렸다.

“예스, 예스, 예스 ! 그레이트! 훨씬 좋아졌어요.”

호탕한 성격에 압도적 카리스마, 그러면서도 짐 캐리처럼 유쾌한 면모까지 갖춘 스켈톤은 한국의 젊은 성악가들을 만나 열정의 일타강사 같이 엄청난 리액션을 하자 그제야 박수와 함박웃음이 터져 나왔다. 헤럴드경제가 단독으로 찾은 지난 24일 국립오페라단 청년교육단원을 대상으로 한 세계적인 테너 스튜어트 스켈톤의 마스터클래스 현장이다.

스켈톤의 마스터클래스에 참석한 테너 김건효/고승희 기자

졸업과 동시에 국립오페라단의 청년 교육 단원이 된 유태영은 “고음을 낼 때 늘 강하게 ‘포르테, 포르테, 포르테’로만 했는데 스켈톤 선생님께서 이 부분을 지적하고 다듬어주셨다”며 “작게 소리를 낸다고 고음이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됐다”고 말했다.

‘최애곡’ 들고 나와 스켈톤 앞에서 노래…극E형 단호박 선생님

수업 전엔 제법 시끌벅적하고 자유분방한 분위기였으나, 한 사람씩 나와 노래를 시작하자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학생과 예술가 사이, 아마추어와 프로 사이의 경계에 놓인 새싹 성악가들은 저마다 고심 끝에 ‘최애곡’을 들고 나와 스켈톤 앞에 섰다.

흔치 않은 기회였다. 유명한 성악가를 만나 마스터클래스를 들을 기회가 국내엔 별로 없기 때문이다. 국립오페라단은 청년 교육단원을 육성하며 1년에 1~2회가량 한국을 찾는 성악가들과 함께 마스터클래스를 열고 있다.

테너 김건효(30)는 이날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에서 만토바 공작이 부르는 아리아인 ‘그녀를 납치하다니…그 눈물이 보이는 것 같아’를 선곡했다. 질다가 유괴됐다는 소식에 슬픔을 담아 선보이는 바람둥이의 아리아다. 관건은 천하의 바람둥이에게도 ‘진심’이 있었다고 믿게 만드는 아름다운 소리를 낸 것이다.

시원시원하고 청량한 음색으로 아리아를 시작했지만, 진도가 쉬이 나가지 못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노래를 멈춘 스켈톤은 “지금 이 부분이 레치타티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가사의 의미를 조금 더 음미하며 부르면 표현이 달라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제 다시 새싹 테너의 시간. 찰떡같이 알아듣고, 노래를 시작해 무사히 완주를 마치자 일타강사의 열강이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왔다.

이날 마스터클래스에서 다섯 명의 성악가의 노래를 듣고 스켈톤이 지적하고 교정한 부분엔 교집합이 존재했다. 한국의 성악 전공자와 이제 막 졸업한 새싹들에게 노상 따라붙는 고질병(?)과 최근 경향에 대한 문제들이었다. 아리아의 흐름과 스토리텔링보다는 고음을 내는 것에 집착해 감정을 놓치는 것이다.

국립오페라단 스튜어트 스켈톤 마스터 클래스에 참석한 소프라노 유태영/고승희 기자

현재 국내 대학의 성악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국내 최정상 소프라노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고음을 내는 것은 너무도 기가 막히게 잘하는데 이 음악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가 부족하고 리듬과 박자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며 “콩쿠르를 겨냥해 소리를 내는 것에만 매몰되다 보니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졌다”고 꼬집었다.

스켈톤이 중요하게 강조한 것 역시 감정의 표현과 다이내믹(음량의 대조를 통해 다양한 정서를 표현하는 것). “무조건 소리만 지르지 말 것”, “강하게 부르려고만 하지 말고 포르테와 피아니시모를 오가며 크레센도와 디크레센도를 잘 표현하라는 것”이었다.

김건효가 부르는 아리아 역시 마찬가지. 스켈톤은 특정 마디를 언급하며 “이 부분에선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가 들어가지 않으니 포르테를 내기에 최적의 구간이다”라며 “그 전엔 피아니시모부터 깔아줘야 이후의 포르테가 더 빛난다”고 했다.

‘빨간펜 선생님’의 일타 수업에 김건효는 바로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리아를 시작했다. 그는 “사실 지금 내 소리의 강점이자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포르테였는데, 스켈톤 선생님에게 이 부분을 꼬집어주셨다”고 했다. 스켈톤은 심지어 리골레토 아리아를 직접 불러주며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줬다. 김건효는 “선생님이 노래하실 땐 굉장히 유연하고, 강하면서 부드러웠다”며 “이렇게 해야 더 아름다운 노래가 될 수 있다는을 알게 됐다”며 감탄했다.

헨델테너의 음악관 묻어난 수업…“성량 집착해 오케스트라와 싸울 필요 없어”

마스터클래스는 스켈톤 그 자체였다. 오랜 시간 무대에 서온 오페라 가수의 음악관이 이날 수업에서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는 “젊은 성악가들이 헬덴 테너(Heldentenor, 영웅적 목소리를 내는 테너)로 장수하는 비결을 묻곤 한다”면서 “오래 가는 비결이라면 내 목소리의 성량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성량에 집착해 그저 크게 부르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내 경우엔 누구보다 아름답게 노래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귀띔했다.

바그너는 물론 대다수 오페라는 소위 ‘성량이 깡패’라고 할 정도로 관객들을 홀리기엔 ‘압도적 목청’을 우선하는 경우도 많지만, 정작 헬덴 테너의 생각은 다른 지점에 있었다. 그는 “오케스트라에서 사람 목소리보다 크게 연주하지 못하는 악기는 없다”며 “굳이 소리 지르고 비명을 지르며 오케스트라에 그런 싸움을 걸고 싶지 않다. 그러니 제발 큰 소리를 내는 것에 집착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트리스탄 이졸데’에서 트리스탄 역을 맡은 스튜어트 스켈톤 [국립오페라단 제공]

김건효는 이날 수업의 가장 큰 성과가 바로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점이라고 했다. 그는 스스로 “음역대가 높아 피아노(p, 여리게)를 내기가 너무나 어려웠다”며 “소리를 내는 공간을 확장해야 더 자유자재로 발성과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현재 오스트리아에서 유학 생활을 하다 청년 교육단원이 된 이다솜(31)은 벨리니 오페라의 ‘청교도’ 중 ‘그대의 부드러운 음성이 나를 감싸고(Qui la voce sua soave)’를 불렀다. 극 중 엘비라가 아르투로를 그리워하며 부르는 이 아리아는 아름다운 선율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복잡한 장식음을 정확한 기교로 소화하는 소프라노로, 한국의 조수미, 디아나 담라우 등이 해당한다)가 화려한 기교를 뽐내는 곡이다.

19세기 벨칸토 오페라의 대명사인 이 아리아는 이다솜의 변화무쌍한 표정 연기와 함께 이어졌다. 스켈톤은 그의 아리아를 듣고 “벨칸토 오페라는 특별한 줄거리에 집중하기보단 우아하고 아름답게 부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이 역시 그의 철학이 담긴 조언이었다.

스켈톤은 바그너 무대에 주로 서는 테너지만, 그의 음성엔 섬세한 감정들이 살아있다. 바그너가 벨리니에 특히나 애정을 보였던 만큼 스켈톤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무대에서도 내지르는 육중한 헬덴 테너가 아닌 우아한 벨칸토 창법을 염두하고 노래한다.

그는 “바그너의 ‘리엔치’ 첫 아리아는 벨칸토와 매우 흡사하다”며 “3막에서 트리스탄이 육체적, 감정적으로 영혼의 한계에 다다를 땐 단지 비명만 질러선 안 된다. 최대한 트리스탄의 노래를 천사처럼 들리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스켈톤의 마스터클래스는 일종의 ‘정답노트’였다. 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잡아줬다. 지금 당장 이 곡을 들고 콩쿠르에 참가해도 될 정도로 구석구석 놓치지 않았다.

그는 이다솜의 아리아에 대해 “E플랫 낮은 옥타브에서 너무 빠르지 않게 정교하게 작업하고, 조금 더 시간을 들여 호흡해야 한다. 누가 쫓아오는 것이 아니니 시간을 들여서 노래하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엘비라만의 이야기, 소프라노가 주축이 돼 오페라를 끌고 가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라고 조언했다.

수업 이후 이다솜은 “엘비라의 불안정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선생님께서 그 부분을 짚어 더 많이 표현하라고 하셔서 그동안 공부랬던 것이 헛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고, 부족했던 부분을 보완하게 됐다”고 했다.

스켈톤이 한국의 젊은 성악가들과 만나 반복적으로 강조한 것은 노래 시작 부분의 중요성이다. 첫 호흡에서의 숨결이 첫 음으로 이어질 때 반드시 명심해야 할 공식이 있다. “어떤 언어로, 어떤 노래를 하든지 간에 첫음절의 모음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곤 실전. ‘하, 헤, 히, 호, 후’라고 해보라는 것이었다. 그의 한 마디에, 현장의 모든 학생은 난데없이 앵무새가 돼 ‘하, 헤, 히, 호, 후’를 따라한다.

이다솜은 “입을 닫고 있다가 노래를 할 경우 소리가 호흡으로 연결이 안 되니 이 방법으로 하면 더 자연스러운 음악이 된다”고 말했다. 김건효는 “사람마다 신체적 구조가 다른데,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모음에 호흡을 붙여 시작하면 노래할 때 프레이징을 길게 가져가는 부분에서도 데미지가 덜 했다. 굉장히 중요한 꿀팁”이라며 “다른 노래에도 적용해서 나를 발전시킬 수 있는 부분이라 너무나 뜻깊고 의미 있었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