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까지 마당놀이 ‘홍길동이 온다’
이소연·김율희·조유아·홍승희 인터뷰
홍길동이 여자되니 ‘삼충’ 캐릭터 생겨
이소연·김율희·조유아·홍승희 인터뷰
홍길동이 여자되니 ‘삼충’ 캐릭터 생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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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극장 마당놀이 ‘홍길동이 온다’ 조유아 이소연 김율희 홍승희(왼쪽부터) [국립극장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서민 물가’라면서 국밥 한 그릇에 3만 원 한다고 우기는 눔, 기저귓값 분윳값도 모르면서 출산 장려 운동하는 눔, 지하철 기본요금 물어보면 비서부터 찾는 눔, 비 오는 날 대중교통 타본 적 없는 눔, 관내 마차 타고 골프 치러 다니는 눔.”
작정하고 씹어준다. 극과 현실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자바리가 ‘가짜 홍길동’을 잡겠다며 썩어빠진 정치인을 줄줄이 나열하자, 객석이 들썩인다. ‘얼씨구, 좋다!’ 공연 전 배워둔 추임새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속 시원한 풍자에 묵은 체증이 뻥 뚫린다.
이쯤에서 등장해야 제맛. 그런데 이게 웬걸. 머릿속에 그려본 ‘그 눔’이 아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날아다닌 그 길동이의 미모가 예사롭지 않다. 가느다란 눈매, 영롱한 눈동자, 새초롬한 입매와 날렵한 턱선까지. ‘잘생쁨’(잘생기고 예쁨)을 장착한 홍길동이 출몰하자, ‘얼빠’들은 그새 ‘팬클럽’까지 결성한다.
거한 판이 시작됐다. 청사초롱처럼 빛나는 전구 장식을 매단 하늘극장이 들썩였다. 미취학 아동부터 70대 어르신까지, 자막도 없고 한국식 애드리브가 난무하는 전통극에 외국인 관객까지 극장을 꽉 채웠다. 국립극장의 송년 무대인 ‘마당놀이’, 이른바 ‘온다’ 시리즈가 올해는 ‘홍길동’과 함께 왔다.
이미 표정만 봐도 속내를 읽는 네 사람. ‘모두의 우상’인 이소연을 필두로 중앙대학교 직속 선후배 사이인 조유아·김율희·홍승희가 뭉쳤다. 네 여자의 수다는 마당놀이보다 시끌벅적하고, 홍길동의 풍자보다 매서웠다.
“남편 얼굴이 안 보여요”…금녀(禁女)의 벽 깬 두 명의 홍길동
허균은 홍길동을 남성으로 등장시켰지만, 2000년대의 홍길동은 달라졌다. 바야흐로 ‘젠더 프리’ 시대. 25년 전 ‘마당놀이의 여왕’인 김성녀가 최초의 여성 홍길동으로 여심(女心)을 훔친 이후, 두 명의 여성 소리꾼이 왕좌를 이었다.
춘향, 옹녀, 뺑덕 등 국립창극단의 대표 여주인공을 도맡았던 이소연은 “김성녀 선생님이라는 거대한 산이 눈앞에 있는데 원조 앞에서 홍길동을 하려니 겁이 덜컥 나고 부담도 컸다”고 고백한다. 김성녀는 이 작품의 연희감독이기도 하다. 이소연은 홍길동이 되기 위해 목소리 톤부터 걸음걸이까지 싹 다 바꿨다.
“(김성녀) 선생님이 남성을 표현할 때 내야 하는 어조, 어미 처리, 목소리 톤의 변화를 세세하게 지도하며 길잡이 역할을 해주셨어요. 맡아보지 않은 역할이라 마냥 재밌을 줄 알았는데 제겐 무거운 짐이더라고요” (이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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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길동이 온다’의 이소연 [국립극장 제공] |
김율희도 마찬가지다. 이소연이 ‘여심 사냥꾼’이라면 김율희는 어디로 튈 줄 모르고, 불의를 못 참는 ‘MZ(밀레니얼+Z)형 히어로’로 태어났다. 그는 “키가 작으니 귀여움을 무기로 삼되, ‘작은 고추의 매운맛’을 보여주고자 했다”며 웃었다.
홍길동은 땅보다 하늘 위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다. 와이어를 타고 하늘극장 상공을 가로지르고, 몇 번씩 보여주는 마술에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놀이기구 타는 기분”이라는 김율희와 달리 이소연은 “중력이 거꾸로 솟는다”고 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에 조유아는 “하늘에 분장실이 있어야 할 정도로 하늘에만 머문다”며 웃었다.
“선생님께서 1993년부터 2005년까지 홍길동을 하셨는데, 지금의 저보다 나이가 많으셨어요. 하는 내내 이건 정말 핑계가 없구나, 무조건 해내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돼요.” (이소연)
“길동 오빠, 결혼해요”…마당놀이가 낳은 괴물 ‘삼충이’
“여자는 못 할 게 뭐냐”며 고전을 뒤집자, 없던 캐릭터가 튀어나왔다. 길동의 곁을 지키는 활빈당원이자 ‘1호 팬’ 삼충. 국립창극단 감초 조유아와 객원 홍승희가 맡았다.
“길동 오빠 결혼하자”며 앞뒤 안 가리고 매달리는 열일곱 소녀들이다. “여자도 활빈당을 할 수 있다”고 외치는 당찬 캐릭터로, 분량은 많지 않지만 ‘홍길동이 온다’의 확실한 쉼표이자 웃음 제조기다. 김성녀 감독은 두 사람에게 “하이톤 목소리를 내리고 열일곱 ‘테토녀’처럼 해보라”고 주문했다. “나이 마흔에 17살 연기를 하려니 양심에 좀 찔리더라”며 조유아가 귀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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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길동이 온다’에서 삼충 역을 맡은 국립창극단 조유아 [국립극장 제공] |
조유아는 올해로 벌써 ‘마당놀이 7년 차’. 마당놀이 철만 되면 ‘조성녀’(조유아+김성녀)라는 별칭이 붙는 베테랑이다. 그의 야망은 김성녀 감독과 마당놀이의 대를 잇는 것. “사실 이번에 홍길동 좀 시켜달라고 졸랐더니, 선생님이 와이어를 타야 해서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웃음)” (조유아) 다이어트에 성공했다면 길동이 바뀌었을 수도 있지만, 이번에도 그는 이소연의 전담 파트너가 됐다.
홍승희 역시 마당놀이 9년 차다. 이 시즌만 되면 ‘0순위’로 불려 오는 경기민요 소리꾼이다. 그는 “마당놀이 때마다 한 줄 한 줄 대사가 늘고 출연하는 장면이 많아지고 있다”며 웃었다. 열정 한 보따리를 짊어진 ‘성장형’ 삼충인 홍승희는 “단 한 장면에 나오더라도 좀 더 개성 있고 돋보이게 하려고 방법을 찾고 있다”고 했다. “선배들의 메소드 연기를 보여 매번 감탄해요. 옆에 착 달라붙어 언니들의 광기를 빨아들이고 있어요.(웃음)” (홍승희)
가까이에 있는 K-히어로, 해학과 풍자로 꽉 채워
“창극과 달리 마당놀이는 무대 안과 밖의 경계가 없어요. 웃기려고 작정하면 웃음이 안 나와 코미디가 이렇게나 어렵다는 걸 느껴요. 그때마다 유아가 엄청 든든해요.” (이소연)
마당놀이의 핵심은 관객과의 소통. 등장만 했다 치면, 별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몸짓 한 번에 객석에선 웃음보가 터진다. 관객들을 쥐락펴락하는 데야 조유아를 당해낼 사람은 없다. “고도로 계산된 애드리브”로 무대를 장악하는 ‘만렙’ 조유아는 “이제는 길놀이 때 관객 눈빛만 봐도 ‘오늘 판 좋겠다’, ‘오늘은 내가 좀 더 굴러야겠다’는 감이 온다”며 “관객과 가까이에서 호흡할 때 정말 설렌다”고 했다.
그는 세 사람의 ‘마당놀이 멘토’다. 무대와 객석을 자연스럽게 허무는 그는 1열 관객들에게 다가가 ‘길동 오빠’를 찾고, ‘우리 오빠’라며 장난을 치기도 한다. 이소연은 “마당놀이 구조를 정말 잘 이해하고 있어 유아에게 정말 많이 배운다”며 “내겐 유아가 마당놀이 도우미이자 일타강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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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극장 마당놀이 ‘홍길동이 온다’ 조유아 이소연 김율희 홍승희(왼쪽부터) [국립극장 제공] |
팬클럽 회장답게 삼충이 바라보는 두 홍길동의 매력은 완전히 다르다. 조유아는 “평소 존경하는 소연 언니는 너무 멋있어 진짜 설레고, 아끼는 후배 율희는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했다. 홍승희 역시 이소연은 ‘멋쁨 그 자체’이고, 김율희는 ‘통통 튀는 홍길동’이라고 했다. 둘의 이야기에 이소연이 말을 보탠다. 그는 “유아는 나를 보호해 줄 것 같은 삼충이라면, 승희는 보호해 줘야 할 것 같은 삼충”이라고 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은 세상을 뒤엎은 K-히어로다. 사회가 답답할 때마다 어김없이 소환된다.
“우리의 홍길동은 멀리 있는 영웅이 아니에요.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대신 소리 질러주고, 답답한 속을 뻥 뚫어주는 동네 형, 옆집 언니 같은 사람이에요. 마당놀이는 그 어떤 극보다 해학과 풍자가 잘 녹아 있어요. 너무 가볍지도,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은 통쾌하고 신명 나는 판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김율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