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인 최초 ‘라스칼라’ 수장 정명훈
전민철·강경호·정성욱, 발레스타 훨훨
빛 뒤의 어둠…입시·안전 불감증의 비극
전민철·강경호·정성욱, 발레스타 훨훨
빛 뒤의 어둠…입시·안전 불감증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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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휘자 정명훈이 KBS교향악단의 제10대 음악감독으로 선임됐다. [KBS교향악단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견고한 아성은 무너지지 않았으나, 발밑은 위태로웠다. 2025년 공연예술계는 명암이 공존했다. 한쪽에선 수백 년간 닫혔던 서구 예술의 성벽을 깨부수며 ‘K-클래식’의 신기원을 이뤘고, 다른 한쪽에서는 입시라는 괴물과 안전 불감증이라는 망령이 어린 예술가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세계 최정상의 환호와 비극적 통곡이 공존한 해다.
‘오페라의 심장’ 라 스칼라 점령한 정명훈…유일무이 키워드
‘정명훈’. 올해 클래식 음악계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를 꼽자면 단연 이 이름이다. K-클래식의 원조 스타는 거장이 된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는 현재진행형의 주인공이었다. 모든 분야가 ‘세대교체’에 분주하지만, 지휘의 영역에서만큼은 대체 불가능한 ‘절대 강자’가 바로 정명훈이었다.
역사적 사건은 지난 7월 터져 나왔다. 이탈리아 라 스칼라(Teatro alla Scala)가 정명훈 지휘자를 2027년부터 2년간 차기 음악감독으로 선임한다고 발표하자, ‘클래식 본토’를 자처하는 유럽 유수 언론들이 앞다퉈 논평을 쏟아냈다. 라 스칼라 247년 역사상 최초의 동양인 음악 감독 탄생이었다.
영국 클래식 음악계의 독설가 노먼 레브레히트는 이를 두고 ‘충격적 선택’이라 평했고, 프랑스 ‘레 제코’는 “라 스칼라의 혁명적 임명”이라며 대서특필했다.
라 스칼라는 1778년 개관 이래 베르디와 푸치니가 숨 쉬던 오페라의 성지이자, 철저히 유럽 백인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런 ‘오페라의 명가’가 정명훈에게 빗장을 푼 것은 단순히 ‘최초’라는 수식어를 넘어선 ‘권력의 이동’이자, 정명훈이라는 마에스트로의 위상을 세계만방에 재확인시킨 상징적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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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휘 거장 정명훈이 KBS교향악단의 10대 음악감독 겸 상임 지휘자로 선임, 3년간 악단을 이끈다. [KBS교향악단 제공] |
당시 정명훈과 경합을 벌인 인물은 강력한 현지의 지지를 얻은 이탈리아 출신의 다니엘레 가티였다. 그러나 정명훈은 이사회의 만장일치와 단원들의 압도적 지지를 동시에 얻어냈다. 단원들은 이사회에 “우리는 정명훈과 함께하고 싶다”는 뜻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명훈 감독의 선임 배경에는 양측의 오랜 음악적 신뢰가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다. 1989년 첫 지휘를 시작으로 그는 라 스칼라 필하모닉과 141회 이상의 콘서트를 지휘했고, 9편의 오페라 작품을 84회나 공연했다. 이는 라 스칼라 음악감독을 제외한 객원 지휘자 중 역대 최다 기록이다. 라 스칼라 측은 “정명훈은 밀라노 관객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음악가이자, 극장의 국제적 명성을 높이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이라고 헌사를 보냈다.
지난 6월 한국을 찾은 포르투나토 오르톰비나 극장장 역시 “정명훈 감독은 150년 전의 음악도 현대적으로 들리게 하는 마법 같은 능력이 있다. 라 스칼라가 미래를 향해 더 열린 극장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라며 “그는 베르디가 발견한 보석이자 기적 같은 재능”이라고 극찬했다.
라 스칼라 입성 소식과 더불어 최근 그는 KBS교향악단의 차기 음악감독 겸 상임 지휘자로 선임되며 국내 대표 악단의 지휘봉도 잡게 됐다. 정명훈은 “열아홉 살에 처음으로 지휘한 오케스트라가 바로 KBS교향악단이었다”고 회고하며, “외국 생활을 오래 했음에도 내 나라에 대한 책임과 사명을 늘 느낀다”고 전했다.
지난해부터 정명훈 지휘자는 그야말로 ‘광폭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부산콘서트홀과 부산오페라하우스를 아우르는 ‘클래식 부산’의 예술감독직을 수행 중이며, 2027년부턴 동양인 최초로 라 스칼라의 수장이 된다. 여기에 내년 1월부터 3년간 KBS교향악단까지 이끌며 서울과 부산, 이탈리아 밀라노를 잇는 거대한 ‘음악 삼각편대’를 구축하게 됐다. 허명현 음악평론가는 “세 곳을 동시에 이끌게 된 이번 결정은 정명훈 감독이 자신의 노년 예술세계를 어디에 쏟아부을지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분석했다.
10대 소녀들의 반란과 실내악의 약진…‘신인류’의 탄생
‘거장’의 묵직한 존재감 곁에서, 올 한 해 클래식 음악계는 유달리 10대 소녀들의 약진이 눈부셨다. 전문가들은 바이올리니스트 김서현, 김현서, 김연아의 비상을 올해 가장 빛나는 ‘발견’으로 꼽는다. 진화한 ‘신인류’의 등장이었다.
열일곱 살 바이올리니스트 김서현은 2023년 스위스 티보 바르 국제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 우승을 차지하며 단숨에 음악계의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예원학교를 졸업한 뒤 지난 10월 독일 크론베르크 아카데미 학사 과정에 진학한 김서현은 쇼팽 콩쿠르 우승자 에릭 루, 스타 지휘자 클라우스 메켈레가 소속된 영국 매니지먼트 해리슨패럿과 전속 계약을 맺으며 세계 무대를 향한 날개를 달았다.
류태형 음악평론가는 “정명훈 지휘자와 피아니스트 조성진, 임윤찬의 아성이 공고해지며 상대적으로 다른 연주자들이 주목받기 어려운 시기임에도 바이올리니스트 김서현은 독보적으로 빛난다”며 “콩쿠르 이후 철저한 자기 관리를 통해 더욱 발전된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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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올리니스트 김서현 [연합] |
이탈리아 공항에서 촬영된 비발디 ‘사계’ 즉흥 연주 영상 하나로 1억 9000만 뷰를 기록한 유튜브 스타이자 드보르자크 콩쿠르 최연소 우승자인 11세 바이올리니스트 김연아, 파가니니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 3위에 오른 김현서 역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세계 정복에 나선 당찬 10대 연주자들이다.
실내악 분야에서는 ‘콩쿠르 사냥꾼’ 아레테 콰르텟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올해 금호아트홀의 상주 음악가로 선정된 이들은 글로벌 배급사 플래툰을 통해 첫 앨범을 발매했다.
특히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제 우승의 영예를 안겨준 야나체크의 곡들을 담아낸 음반으로 호평받았다. 허명현 음악평론가는 “2021년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콩쿠르를 시작으로 2023년 모차르트 국제 콩쿠르, 2024년 리옹 국제 실내악 콩쿠르 우승이라는 쾌거를 이루며 평단이 먼저 이들의 재능을 알아봤다”며 “이제는 관객들이 이 보석 같은 연주자들의 진가를 본격적으로 확인할 차례”라고 말했다.
발레계의 아이돌과 미디어…‘아트테인먼트’의 폭발
발레계에도 전에 없던 새로운 스타가 탄생했다.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 퍼스트 솔로이스트 입단 소식으로 지난해 한국 발레계에 파란을 일으킨 전민철은 명실상부한 ‘발레계의 임윤찬’이다. 전민철의 이름이 걸리는 순간 공연은 ‘1분 컷’ 전석 매진을 기록한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출연을 위해 1년간 트레이닝을 받던 중 키가 너무 자라 탈락하고, 발레를 반대하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꿈을 눈물로 호소하던 소년 전민철의 성장기는 그의 인기에 불을 지핀 완벽한 서사가 되었다. 김동근 한국발레협회 회장은 “아이돌 못지않은 피지컬과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드라마틱한 서사, 그리고 무엇보다 뛰어난 기량과 발레를 향한 순수한 열정이 결합하여 폭발적인 시너지를 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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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니버설 발레단의 ‘지젤’에서 알브레히트 역을 맡은 전민철 [유니버설 발레단 제공] |
여기에 엠넷 ‘스테이지 파이터’를 통해 얼굴을 알린 강경호, 기무간, 정성욱 등이 무대로 복귀하자, 방송을 지켜본 대중들이 공연장으로 모여들었다. 미디어와 무대의 선순환 덕분에 발레계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호황을 누렸다.
특히 미디어의 힘을 빌려 발레라는 장르의 높은 성벽을 깨부순 강경호와 ‘스테이지 파이터’ 출신 무용수들은 발레를 대중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매혹적인 ‘아트테인먼트’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화려한 비상 아래 참담한 민낯
무대 위 무용수들이 우아하게 날아오를 때, 그 이면에서는 참담한 민낯을 드러낸 비극이 터져 나왔다.
지난 6월 부산 브니엘예술고등학교에서 발생한 학생 3명의 동반 사망 사건은 ‘입시 도살장’이나 다름없던 한국 예술 교육 시스템의 기형적 구조를 여실히 드러냈다. 학교장과 입시 학원이 결탁한 ‘죽음의 카르텔’은 비상해야 할 미래 세대를 처참하게 짓밟았다. 아이들이 남긴 유서와 일기에는 입시와 학업 스트레스는 물론 “무용하는 어른들이 제일 싫다”는 절규가 적혀 있었다.
최소한의 안전장치조차 없는 공연장은 예술가들의 목숨을 담보로 운영되었다. 지난 8월 세종예술의전당 추락 사고는 한국 공연계의 전근대적 시스템이 가진 치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두 명의 무용수가 3m 아래 오케스트라 피트로 추락해 갈비뼈가 부러지고 장기를 절제해야 하는 치명상을 입었음에도, 공연 단체가 ‘산재보험’조차 가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수면 아래 잠겨있던 분노가 폭발했다.
심지어 국내 콩쿠르의 병역 혜택 문제,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 교수들의 인사와 윤리 문제, 국립무용단의 과거 성범죄와 채용 비리로 문제가 된 원로 무용가들의 공연을 선보이는 기획을 내놓은 것까지 갖가지 도덕적 안일함이 터져 나왔다.
한국춤비평가협회는 최근 ‘건강한 춤 생태계 조성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무용계의 환골탈태를 촉구했다. 성명서는 “아이들을 맹목적 입시경쟁으로 내몰지 않는 교육 개혁, 투명한 사업 운용, 공공 무용단의 공공성과 예술성 담보, 그리고 무용수의 안전 보장”을 강력히 요구했다.
익명을 요청한 한 무용계 관계자는 “그동안 부조리를 목격하고도 말 한마디 꺼내기 어려워 쉬쉬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고 토로하며, “과거의 악습과 무대 뒤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지 않으면 이런 비극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강력한 법제화로 윤리적 가이드라인을 도입하고, 예술인에게서 예술인을 지키는 제도적 안전망이 절실하다”고 호소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