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황혼열차’로 데뷔…아역스타
‘바람 불어 좋은 날’로 충무로 성공 복귀
최초 천만 영화 ‘실미도’로 제2의 전성기
2019년 혈액암 투병…현장 못 돌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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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7년 4월 배우 안성기씨가 서울 마포구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데뷔 60주년 간담회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 |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영화는 나의 꿈, 나의 행복, 삶 그 자체...”
평생을 영화 외길만 걸었다. 그의 인생엔 드라마도, 뮤지컬도, 연극도 아닌 오로지 영화만 있었다. 대통령과 거지로, 스님과 군인으로, 때론 평범한 아버지로. 1957년 데뷔부터 70년간 영화계를 지켜온 안성기는 한국 영화사의 산증인이자 변전무상했던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었다.
안성기는 5일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 중환자실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했다. 향년 74세.
그는 지난달 30일 오후 자택에서 음식물을 먹다 쓰러져 심폐소생술(CPR)을 받으며 자택 인근 병원의 응급실로 이송됐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안성기는 1957년 김기영 감독의 작품 ‘황혼열차’에 출연하며 아역으로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아버지의 친구였던 김 감독이 당시 5살이었던 그를 데려다가 연기를 시킨 것이 시작이었다.
‘모정’(1958), ‘10대의 반항’(1959), ‘하녀’(1960) 등 7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아역 스타로 자리매김했지만, 이후 학업에 전념하기 위해 10여년간 배우 생활을 쉬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베트남어를 공부했다. 그리고 1977년 학업과 군 복무를 마친 그는 ‘병사와 아가씨’을 통해 충무로 복귀를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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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화장’(2015) |
안성기는 1980년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로 대종상 신인상을 품에 안으며 성인배우로서 발돋움에 성공했다. 영화에서 그는 중국집 배달부 ‘덕배’를 통해 현실 속에서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 그 시대 청년들의 얼굴을 연기했다. 한국 사회가 처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리얼리즘 영화 부활의 신호탄이었다.
이후 청춘 영화 대표작인 ‘고래사냥’(1984)을 비롯해 ‘만다라’(1981), ‘깊고 푸른 밤’(1985), ‘철수와 만수’(1988) 등 출연작들이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큰 성공을 거뒀고, 이를 발판으로 안성기는 ‘국민 배우’의 반열에서 80년대 한국 영화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때론 정치적 혼란과 억압 속에 구도의 길을 걷는 수도승으로, 때론 답답한 현실에서 자유와 해방을 꿈꾸는 부랑자, 그리고 성공주의와 물질주의에 사로잡힌 야망가로 스크린을 누볐던 그는 현대사의 혼란과 고통, 변화 속에 고뇌하는 청춘의 상징이었다.
이후에도 안성기는 쉬지 않고 작품활동을 이어가며 데뷔 이후부터 2020년대 초까지 170여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그의 작품은 한국 영화사의 흐름을 바꾼 이정표가 됐고, 그의 연기는 수십 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회자하는 명장면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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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바람불어 좋은 날’(19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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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하얀 전쟁’(1992) |
특히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1990)에서 안성기가 그려낸 종군기자 출신 빨치산 ‘이태’는 전쟁의 비극과 이념의 허상을 대변하며, 분단을 이념 대립의 소재로만 이용했던 당시 사회적 금기를 깨는 파격적 소재로 주목을 받았다. 분단 영화의 공식을 깨트린 이 영화로 안성기는 당시 17년 만에 부활한 청룡영화상과 춘사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단순한 스타를 넘어 역사의 상처를 응시하고, 시대를 증언하는 페르소나의 등장이었다.
이어 안성기는 ‘하얀 전쟁’(1992)으로 정 감독과 다시 의기투합했다. 그는 베트남 전쟁 참전 이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리는 ‘한기주’를 통해, 당시 승전이란 구호에 가려져 외면 당했던 전쟁의 상처와 후유증을 세상에 알렸다.
이어 1993년 박중훈과의 콤비 연기를 선보인 영화 ‘투캅스’(1993)는 한국형 코믹 액션의 시초이자 한국 영화의 장르적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안성기는 이듬해 백상예술대상 대상을 수상하면서 “‘코미디 영화는 상과 관계없다’는 편견을 불식시키고 새로운 시각으로 심사해 준 분들께 감사하다”며 소감을 전하기도 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에서는 카리스마 있는 연기를 선보이며, 빗속에서 주먹을 나누는 희대의 명장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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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
한국 영화 최전성기의 선봉에도 안성기가 있었다. “날 쏘고 가라”라는 명대사를 남긴 ‘실미도’(2003)는 한국 영화 최초 1000만 관객을 기록하며, 흥행 역사의 신기원을 썼다. 그는 2006년 ‘라디오 스타’가 국민적 사랑을 받으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고, 이후에도 ‘부러진 화살’(2011), ‘화장’(2014) 등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오며 한국 영화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역할을 했다.
안성기는 작품 활동 외에도 ‘큰 어른’으로서 위기의 최선전에서 영화계를 지켜왔다. 스크린 쿼터(국산 영화 의무 상영제) 사수 운동이 대표적이다. 스크린 쿼터 축소 논의가 일었던 지난 2006년 그는 직접 피켓을 들고 거리로 향했다. 당시 홀로 광화문에선 안성기는 스크린 쿼터 사수 공동 집행위원장으로서 “내 몸이 반쪽 나는 듯한 기분”이라며 정부에 강하게 항의했다.
이외에도 안성기는 불법 다운로드 반대,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의 자유’ 지지 등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며, 위기 속에서 언제나 영화계의 목소리를 대변해 왔다. 촬영장 안팎에서 후배들과 스태프들을 따뜻하게 챙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더불어 30년 넘게 국제구호단체 유니세프의 친선 대사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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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기가 지난 2006년 광화문 광장에서 스크린 쿼터 축소 반대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 |
그의 ‘영원한 콤비’인 배우 박중훈은 “안성기라는 사람은 사람으로서 정말 훌륭한 품성을 가진 인격자”라면서 “훌륭한 분과 있으면서 좋은 영향을 받은 것이 가장 큰 행운”이라고 말했다.
안성기는 2022년 한 언론 인터뷰를 통해 지난 2019년 혈액암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이어온 사실을 뒤늦게 알렸다. 영화 ‘탄생’(2022) 촬영 당시에는 작품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제작진에게 투병 사실을 숨기고 촬영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힘든 투병 생활 중에도 연기에 대한 열정과 복귀 의지를 놓지 않았다. 지난 2022년 대종상 공로상 수상 당시 그는 영상을 통해 “내 건강을 너무 많이 걱정해 주시는데, 아주 좋아지고 있다. 새로운 영화로 여러분들을 뵙도록 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식, 4.19 민주평화상 시상식 등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곧 촬영장에 돌아올 것”이라던 그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투병 중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현재를 ‘겨울’에 빗댔던 그는 봄을 기다리는 국민들의 곁으로 돌아오지는 못했다. 70년. 반세기가 넘는 시간 안성기와 함께한 한국 영화의 70년은 따뜻한 봄이었고, 뜨거웠던 여름이었으며 눈부신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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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 안성기 [연합] |
“오래 하는 게 꿈입니다. 나이 먹었어도 에너지를 보여주고 싶거든요. 관객들에게 노쇠함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오래고 싶은 이유는 제 뒤에 있는 후배들 때문이기도 해요. 영화계에 제 또래가 남아있지 않아요. 후배들의 정년을 늘리는 역할을 제가 해야죠.” (2017년 데뷔 60주년 기념 특별전 기자간담회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