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파이프라인 세계 3위 성적표의 이면…‘K-블록버스터’ 왜 안 나오나

25년간 38개 신약 배출했으나 상업적 성과는 미진
“리소스 차이로 성공만 좇아… 도전적 문화 부재”
모달리티 혁신·정책 지원으로 ‘데스밸리’ 넘어야


신약개발. [게티이미지뱅크]


[헤럴드경제=최은지 기자] 대한민국 제약·바이오 산업이 ‘질적 성장’이라는 냉혹한 시험대에 올랐다. 1999년 ‘선플라주(SK케미칼)’를 시작으로 지난 25년간 총 38개의 국산 신약을 배출하며 외형적으로는 글로벌 선도국 수준에 진입했다. 특히 2024년 기준 국내 신약 파이프라인은 3233개로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에 등극하며 영국마저 제쳤다.

하지만 현장의 목소리는 낙관론과는 거리가 멀다. 연 매출 1조원 이상의 글로벌 블록버스터가 부재한 상황에서, 축적된 파이프라인이 실제 상업적 성공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허가된 38개 신약 중 10개 품목은 생산 중단이나 품목 허가 자진 취소 등으로 시장에서 사라졌다. 이는 한국이 신약을 ‘만드는’ 국가를 넘어, 글로벌 시장에서 ‘지속 가능한 가치’를 창출하는 데 여전히 한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 바이오헬스정책연구센터는 ‘국산 신약 25년의 이정표와 블록버스터의 탄생’ 보고서를 통해, 국산 신약이 글로벌 블록버스터로 도약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로 글로벌 빅파마와의 압도적인 ‘자본 격차’에서 오는 구조적 한계를 짚었다.

글로벌 신약 한 알을 개발하는 데 평균 수조 원이 투입되는 반면, 국내 신약 개발비는 평균 423억 원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자금력의 열세는 국내 기업들이 임상 후기 단계의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유망 후보물질을 조기에 기술 수출(L/O)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다.

이는 현장의 연구 환경마저 경직시키고 있다. 한 제약업계 대표는 “우리나라와 미국은 리소스(자본과 인력)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며 “미국 대형 제약사는 여러 연구실을 운영해 일부만 성공해도 되지만, 한국은 제한된 자원으로 인해 한 연구실에서 반드시 성과를 내야 하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이어 “성공할 수 있는 방향만 생각하다 보니 오히려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기업에 심기가 어려운 경향이 있다”고 현장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게티이미지뱅크]


전문가들은 이제 단순한 양적 확대를 넘어 정교한 ‘투 트랙’ 대안 전략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우선 대형 질환 시장에서 직접 경쟁하기보다 미충족 수요가 확실한 희귀 질환을 타깃하는 ‘니치 버스터(Niche-buster)’ 전략이다. 여기에 ADC(항체-약물접합체), 이중항체, CGT(세포·유전자 치료제) 등 기존 치료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차세대 ‘신규 모달리티(Modality)’로의 신속한 전환이 필수적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국내 신약 파이프라인 중 항체 및 세포·유전자 치료제 비중이 50%에 육박하는 등 이미 기술적 변곡점은 시작됐다.

이러한 전략이 결실을 보려면 정부의 정책적 뒷받침도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무엇보다 기초 연구가 산업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되는 분절 구조를 해소하기 위해 ‘임상 2상 이후의 데스밸리(Death Valley)’를 넘는 집중 지원이 시급하다.

특히 규제 기관인 식약처의 역할 변화에 대한 목소리도 높다. 보고서는 “식약처가 임상시험 진행 중 중간 단계에서 조언을 제공하는 등 단순 규제 기관을 넘어 개발 파트너로서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심사의 문턱을 높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글로벌 기준에 맞는 임상 디자인을 함께 고민하는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울러 연구 역량과 경영 전문성을 분리해 교수는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전문 어드바이저 체계가 구축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현장에서는 “정부가 교수 창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으나, 연구와 경영을 동시에 수행하기는 어려워 실효성이 낮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우수한 기술이 자본 시장에서 제대로 가치를 인정받고 제품화로 이어지려면, 미국처럼 심도 있는 경영 조언을 제공할 수 있는 전문 매니지먼트 시스템 도입이 절실하다.

업계 관계자는 “디스커버리(후보물질 발굴) 단계만 달성해도 성공으로 인정하는 개념 변화가 있어야 연구자들이 보다 과감하고 창의적인 연구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며 “결국 실패를 자산으로 삼는 도전적 문화와 식약처의 파트너십 같은 정교한 정책 지원이 결합될 때 비로소 세계 3위 파이프라인의 위상에 걸맞은 ‘K-블록버스터’ 탄생이 현실화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